"(...)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회가 닿는다면, 미래에든 천국에서든 감옥에서든 지하에서든 다른 어떤 곳에서라도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이 탈출했을 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마거릿 애트우드, 김선형 역, <시녀 이야기> 458쪽)
때로 우리의 말들은 사치스럽다. 말은 어느새 말로서의 기능과 의도를 잊고 공중만 멤돌다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내뱉은 말들이 타인에게 가 닿으리라는 믿음이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입을 열고 말들을 엮어낸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나와 타인들, 타인들의 타인들, 우리의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또 기억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본래 말이란 타인과의 소통이자, 세계에 대한 믿음이자, 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말을 하고 너와 연결됨으로써 나는 비로소 이 세상에 하나의존재가 되고,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세계에 속한 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듣는 이 없는 말이란 실은, 나 스스로가 이곳에 발 딛지 못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증명은 반드시 한 가지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듣는 이를 통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증명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듣는 이가 존재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스스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낼'수도 있다. 요컨대 이는 자기실현적인 선언이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들을 '당신'은 분명 있을 것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빛 한 줄기 없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가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증명하고 지켜나가는 방식이다.
여성주의적 구술사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말함으로써 기록이 되고, 그것이 역사가 되는 방식에 대하여 고민해 본다. 역사란 자고로 당대의 모든 시대상을 오롯이 객관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믿는 우리에게, 한두명의 입을 통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야사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일상의 가장 사소하고 하찮은 기억들, 예컨대 그 일이 일어난 날 아침의 유달리 차고 맑았던 공기나 구름의 모양, 대기의 술렁임, 잠깐 찌푸린 하늘 아래서 재채기를 몇 번이나 연달아 했던 기억들, 같은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사소한 기억들 내에서도 위계는 있다. 예컨대 출정 전날 저녁 전투화를 윤이 나게 닦았던 병사의 기억은 그를 위해 밥을 짓던 여성이 부엌불을 들여다보던 기억보다 훨씬 중요하다. 시위에 나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던 남성의 기억 역시 그를 위해 도시락을 만들고 치마폭에 숨겨 나르던 여성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를 가진 것으로 얘기된다. 말을 통하여 남는 기록은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기록일수록 더더욱 사소하고 '하찮다'.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록들에 밀려 사라지는 이들의 기록,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기록, 그러니까 우리들의 기록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가만히 앉아 기록함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역사는 때로 가장 적극적인 재판관이 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덮고, 찢어발기고, 해체하고, 또 왜곡시킨다. '우리의 목소리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외침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잊히지 않고 바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때 어떤 외침이 들려온다. 우울하고 축축하고 가녀린 고민들을 뚫고 들려오는 고함소리. "나는 당신이 존재할 것을 명령하는 바이다."
스스로 소리치는 역사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이야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줄 것을 부탁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기억할 것을 명령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울 수 있는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 이것은 과연 가능한가?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위계를 뒤집고, 기록하는 자와 그것을 평가하는 자의 권력을 전복하여 펜끝을 역사가의 가슴에 바싹 들이미는 일은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해낼 수 있을까? <시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어쩌면 이를 시도한 최초의 모험가 중 한 명인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가장자리를 잘 밟아 다지는 것처럼, 그는 끝없이 예전의 기억들을 회상하고 그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한다. 끝없이 뇌를 멈추지 않고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실제보다도 더욱 생생히 간직하려 애쓴다. 자신의 목소리를 끝없이 의심하고 자신이 실은 미쳐버린 게 아닌가, 이 모든 게 꿈인 것은 아닌가, 아니 실은 원래의 삶이었다고 믿고 있던 것이 그저 자신의 망상은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적어내려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페이지 너머를 똑바로 겨냥한다. 펜도 없이 갈라진 손톱을 들이밀며, 누구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을 존재케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과연 후대의 이들에게 제대로 가 닿았던 것일까? 어쩌면그의 목소리는 애초의 의미를 잃고 결국 하나의 사료 혹은 흥미로운 이야기(tale)로 소비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실은 그의 이야기를 '시녀 이야기'로 부르는 것 자체가 모욕인지도 모른다. 만약 최초의 발견자에게 그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잘 가 닿았다면, 아마 그는 감히 그런 이름을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표현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시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대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제도와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의 시각을 통해 봤을 때 이들이 그저 이상하고 어리석은 이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한때 신념처럼 떠받들었던, 아니 실은 너무 당연해서 신념이고 뭐고 뭐 당연한 소리지 하고 넘어갔던 말을 돌아보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가시에 처음으로 심장을 찔렸음을 깨닫는다. 마음을 베이고 여러 번 찔려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괴로워졌음을 깨닫는다. '당대인의 시각'. 나는 그동안 과연 사료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뭘로 읽어 왔던 것일까. 당대인의 시각이란 대체 누구의 시각을 얘기하는 걸까. 그 당대인의 시각 속에서조차 나의 주인공들은 버려지고 배신당해 나뒹굴었을 것이 분명한데. 객관적 시각이니 지식이니 하는 것들에 이미 오래 전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야비하고 비겁한 지식생산자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사학을 공부하며 얻었던 지식과 신념들은 다시 한 번 부서진다. 나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있다.
내가 봤을 때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기억과 목소리, 전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떻게 잊혀지지 않고 전달되고 기록되어 역사가 되는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역사가에 의하여 채택되어 역사가 되는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면서 직접 잉크가 되는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시나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말로 풀어낼 자신은 없으나 생각의 전환을 하게끔 해 준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너무 가슴이 아파서 힘들고 괴로웠고, 얼굴 뻔뻔한 역사가들의 목소리에 나 자신의 모습이 이입되어 더욱 힘겨웠다. 힘겨움이 내게 어떤 결실을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