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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티의 양적 방법론으로의 전환, ‘고전’과 이에 대한 정밀한 읽기에 대한 모레티의 (우회적) 비판은, 인문학의 사회과학적 전회 또는 ‘빅데이터 인문학’의 초창기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는 인문학은 ...‘지금-여기’에서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철학사에서 철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과학문을 낳고 계속 빈약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즉 학문이 발전할수록, 철학의 경계는 좁아진다. 탈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자연과학자였고 문학자였으며 사상가이고 정치가였다. 그러나 오늘날 ‘철학(자)’는 자연과학자도, 문학도도, 정치가도 아니라,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은 꾸준히 메타적으로 학문들의 임계점, 사유를 사유해왔다는 점에서 당연히도 여전히 유의미하고 연속적이다. (과학철학같은 비교적 ‘새로운’ 철학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모레티 식의 양적 방법론 근저에는 인문학에 대한 불신 내지는 (질적 연구로서의) 인문학이 ‘엄밀한 과학’에 비해 설명력이나 ‘과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다른 ‘과학’에 도움을 받아 혁신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분과학문이라는 체제 자체가 복잡한 대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학문 자체의 필요성과 편의에 따라 발전되어온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분과학문들 서로는 원래 서로의 도움을 받아 세상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도모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그리고 인문학의 양적 연구도 분명 유의미한 앎들을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인문학적) ‘면밀한 읽기’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의의를 변호할 필요는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과학의 질적 연구가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고 ‘미국적’ 양적 연구가 주류를 이룬 상황과 대학 내에서 인문학이 ‘고사’ 위기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이러한 변호는 필요성이 있다.

고전에 대한 페미니즘적, 퀴어 비평적 비판, 그리고 고전 형성관련 제도적 연구를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고전’ 연구는 한 편으로 역사연구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문학사/이론에 대한 연구이다.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연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일반화와 이론화라고 할 때, 인문학적 고전 읽기는 일반화와 이론화라는 방향성을 포기하지 않지만 동시에 한 개인과 개별 텍스트의 독특성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목표로 한다. 이의 유의미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늘날처럼 ‘인적자원’과 같은 개념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독특성’에 대한 주목은 ‘비용편익’ 분석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사회생물학의 유전자/생물학 환원주의식의 통섭으로는 절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독특성과 개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떠한 독특성들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 이 독특성들은 일반화될 수 있는 계기로 나아갈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는 그 독특성들의 합이고, 독특성들을 독특성으로 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타자의 독특성은 내 안의 독특성을 이해하게 한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무수히 많은 종자들로 이루어져있고, 각 개인은 무수히 많고 무수히 다양한 종자들로 이루어져있다. 그 종자들의 결합태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각 개인의 독특성을 이해할 때, 이는 어떤 측면에서 나의 독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즉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여 이론화하는데 주목적이 있다면, 인문학은 복잡한 현상을 그 복잡함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레티가 논문을 시작하는 인용구에서 “내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라고 한 것은 상징적이다.)

또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어떤 개인에 대한 이해는 시공간에 제한된 나의 앎을 넓히고, 이를 통해 나에 대한 이해도 심화된다. 여기서 이해의 심화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를 포함하는 동적인 것이다. 역사적 구성물로서의 나에 대한 이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심화된다. 따라서 인문학적 ‘질적’ 방법론으로서의 ‘읽기’는 분명 유의미한 것이고, 대학은 물론 모든 연령대 (유치원부터 성인까지)에, 타자를, 세계를, 그리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 유의미한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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