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이것저것 참다가 밤이 되어 찬술을 마시는 순간이면, 낮의 불안과 불행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영원히 내일이 오지 않을 듯한 기분, 내일이 오더라도 지금 이 낙천적인 기분으로는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을 듯한 기분,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좀 더 마셔도 될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은 물론 근거 없는 환상이었다. 이튿날 아침이면 숙취와 자괴감을 남긴 채 사라질 환상이었다. 하지만 술이 그런 환상을 자아낸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환상에 의지했던 그 시기의 내가 술을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