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스스로가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암 투병, 완치, 재발, 호스피스 상황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그 간호를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감없이 죽음과 함께했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겨울에 얼어죽는 개도 여러 차례 봤다. 노환과 다른 질병으로 동물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여 안락사를 진행하는 자리에도 있었다. 사고나 다른 이유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가 사망을 한 가까운 지인도 여럿이다. 죽음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죽음의 에티켓'을 읽으면서 죽음과 애도는 문자로 정리가 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체감하였다. 죽은 존재가 나와 어떤 관계였는지, 친밀도의 차이, 감정적인 온도, 그 사람/동물/존재가 죽었을 때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죽음 이후의 일 처리 방식과 애도 기간은 언제나 달라졌다. 어떤 죽음은 평온한 일상에서 급작스레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롤란트 슐츠는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과정 그 자체에 대해서 정리를 하였다. 이 글은 심각할 정도로 드라이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려야 할 정도로 감정적인 것도 아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을 최대한 적당한 온도로 글을 적어나갔다. 아마 나에게 죽음에 대한 글을 쓰라고 했다면, 쉽게 읽어내리지 못할 감정이 섞여 있는 문자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어떤 죽음을 보고 느꼈는지에 대해 나오는 글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