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내용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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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만화로 본 '소공녀'가 아닌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은 공주 세라>를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다. 만화로 볼 때는 단순히 부잣집 딸인 주인공이 잠시 가난해졌다가 다시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세라의 생각, 말들, 타인을 대하는 태도 이 모두가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7살에 처음 아빠와 떨어져서 기숙학교에 간 이후 어린 나이임에도 하는 말들과 행동들이 기품 있으며 어른들보다 더 성숙한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세라가 친구들과 하는 말들 중에서 꼭 기억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은 게 많아 밑줄 긋기로 첨부하였으며 별도로 이 내용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서 가끔씩 들여다보고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단순한 명작 소설로 시작했지만 책을 다 덮은 이후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순간까지 세라의 매력과 그가 했던 행동과 말들이 주는 울림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인물들로 인해 마음이 계속 아팠는데 그들은 베키와 ‘빵집 앞에서 만났던 굶주림에 지친 작은 아이’다.
베키는 기숙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이고 교장과 요리사들의 구박을 받으면서 다락방에서 사는데 세라는 원래 본인의 좋은 방에 있을 때부터 베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음식도 나눠주었다. 세라의 열한 번째 생일파티 때는 민친 교장이 베키를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천대하였지만 세라가 베키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민친 교장이 베키를 다른 학생들과 너무 가까이 있지 말라고 하면서 철저히 구분짓는 모습과 상반되게 세라는 베키를 하녀로 대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대해주었다. 이런 따뜻한 응대를 거의 받아 보지 못 한 베키가 세라와 함께 있으면서 매우 즐거워하고 처음으로 웃음이 뭔지 알게 된 게 좋기도 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비슷한 나이인 다른 아이들은 교실에서 교육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추억을 쌓고 있지만 베키는 학교의 잡일을 하고 어른들의 구박과 냉대에 시달리는 게 씁쓸했다. 세라 아빠인 크루 대위의 사망 이후 세라가 다락방으로 쫓겨 나고 나서 베키와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베키는 세라가 해 주는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면서 듣고 둘은 스스로를 베르사유 감옥의 죄수들처럼 상상하면서 팍팍한 현실을 견뎌 나간다.
세라가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너무나 배고픈 상태에서 우연히 발견한 은화를 가지고 빵집에 가기 전 발견한 작은 아이는 넝마 뭉치에 가까웠으며 배고픔에 고통 받고 있는 상태였다. 세라도 밥을 먹지 못 한 터라 배우 배고팠지만 그 작은 아이가 빵을 꼭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은화로 산 빵 6개 중 5개를 그 아이에게 주고 자기는 하나만 가지고 사라진다.
당시 런던은 이 작은 아이처럼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끼니를 챙기지 못 하고 굶어 죽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밥을 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어린 아이들이 몇 끼를 먹지 못 하고 굶고 있다는 것도 매우 가슴 아픈 상황이고 이들을 보살피고 챙겨줘야 할 어른들은 그 빵집 주인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똑같은 사람> 장을 읽으면서 당시 런던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고 해도 어린 아이들이 학대 받고 고통 받는다는 게 매우 마음 아프고 화도 났다.
다행히 세라가 아빠의 친구로 밝혀진 ‘인도 신사’ 캐리스포드씨를 만나 기숙학교를 나온 후에 다시 그 빵집을 찾아가서 빵집 주인과 작은 아이와 재회하게 되고 훈훈한 결말로 끝을 맺게 된다. 여기서 또 세라에게 감탄한 부분이 있었는데 캐리스포드씨에게 빵집 주변을 기웃거리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빵을 주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본인도 지독한 굶주림의 경험이 있으니 아이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았고 멋진 제안을 하여 향후에 아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는 생각은 어른들보다 더 성숙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였다. 그리고 다행히 빵집 주인도 굶주린 아이를 내치지 않고 빵을 주고 본인 가게에서 일을 하게 하면서 머물게 해 주는 따뜻한 마음씨의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위에서 말한 빵집 주인처럼 어른의 역할을 하고 아이를 보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보호하고 교육자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역할을 하지 못 한 민친 교장이 소설 속 가장 악독한 인간으로 나온다. 세라를 본격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한 프랑스어와 관련한 교실의 에피소드부터 소설의 말미까지 민친 교장은 세라를 괴롭게 하는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는데 보통 어린이 소설의 악역이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고 변하는 것과는 달리 이 교장은 끝까지 악독함을 벗지 않는다. 세라의 아빠인 크루 대위가 엄청난 부자이기 때문에 세라에게 친절히 대하는 척을 했으며 ‘전시용 학생’으로 삼아 학교 이름을 알리는데 이용할 목적 밖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크루 대위가 사망한 후에도 세라에게 위로의 말을 하기는커녕 세라에게 들인 본인 돈부터 생각하는 속물이며 나중에 세라가 크루 대위로부터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얻은 엄청난 유산을 받게 된 사실을 캐리스포드로부터 듣고 나서도 본인이 세라를 위해 좋은 교육적 환경을 제공했다는 거짓말을 하기까지 한다. 다른 행동들도 지탄받아야 하지만 교장이 한 행동 중에서 가장 화났던 부분은 세라에게 벌을 준다는 명목으로 밥을 굶기고 추운 겨울을 날 옷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것과 어린 아이들에게 뺨을 때리는 모습이다. 강도가 매우 심할 정도로 아동 학대를 한 것인데 민친 교장은 본인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세라에게 가졌던 자격지심이 더욱 커지는 것 외에는 특별한 외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물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교장의 실상을 알게 되어 학교의 평판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고 하인들과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본인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겠지만 일반적인 권선징악적인 방법으로 교장을 벌하지는 않는다.
풍족하게 살다가 갑자기 바뀐 현실이 괴로운 상황임에도 세라는 본인의 상상 속에서 고통을 잠시 잊고 이겨낸다. 비록 배고프고 추운 현실을 바로 바꿀 수는 없지만 본인이 만든 이야기와 상상 속에서 밝고 즐거움을 찾아냈고 다락방 벽 속에 있는 쥐에게도 멜키세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친구처럼 대한다. 멜키세덱에게 빵 부스러기도 주고 쫓아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세라의 마음을 읽었는지 멜키세덱도 세라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락방에서 공존하게 된다. 어둡고 추운 다락방 창문을 통해 세라는 하늘과 구름을 느꼈고 침대 속에 별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궁전으로 만들어 나갔다. 좋은 옷을 입고 풍족하게 사는 공주가 아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괴로움을 상상력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었고 그 좋은 영향을 친구 베키, 어먼가드, 로티 삼총사에게도 나눠준다.
배고픔에 괴로워하는 아이를 모른 척 하지 않았고 힘든 친구의 아픔도 어루만져주고 남루한 옷차림일지라도 늘 또렷한 눈빛과 품위 있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세라의 모습들은 공주라고 하기 충분했고, 나중에 캐리스포드를 만나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 부자가 된 이후 실제로 공주같이 풍족하게 살겠지만 내가 느낀 세라의 진정한 공주의 면모들은 다락방에서 살면서 보여준 것들이다.
어린 아이치고 너무나 성숙한 마음가짐과 울지 않는 의연한 모습이 안타깝기는 하였지만 공주가 되기 위한 까다로운 자격요건이 있다면 세라는 충분히 그 요건을 갖추고도 남은 아이라고 생각한다.
세라의 옆 집 ‘인도 신사’ 집의 인도인 하인 ‘람 다스’ 가 지붕을 오가면서 세라를 도와주었고 결국엔 아빠의 친구 캐리스포드를 만나 막대한 유산을 받는 해피엔딩을 맞지만 세라는 본인의 영민함, 배려심,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침착함, 엄청난 상상력과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는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훌륭하게 잘 컸으리라 생각한다. 어른이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아이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천천히 자신의 상황을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1888년 어린이 월간지에 이 소설을 처음 연재하였고 당대는 지금과 시대적 상황도 다르다. 그렇지만 나는 소설이 주는 재미와 더불어 세라가 들려주는 말들에 따뜻함과 위로를 받았고 조금 더 보태자면 이 어린이가 보여주는 행동과 말을 별도로 자기 계발서나 지침서로 출간해도 될 만큼의 울림을 얻었다. 세라처럼 한창 책을 ‘집어삼키고 목말라하는’ 어린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도 보면 좋을 내용들이 많으니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끝으로 걸 클래식 컬렉션에 적힌 작은 공주 세라의 문구를 덧붙여 본다.
“가장 힘들 때 끝까지 지켜내는 인간의 자존감에 대하여”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난 인형들이 우리 몰래 많은 일을 한다고 믿거든요. 에밀리는 읽고 말하고 걸을 줄도 알지만, 방에 아무도 없을 때만 그러는 거예요. 에밀리가 가진 비밀이에요. 마리에트도 짐작하겠지만,인형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알려지면 사람들이 일을 시키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형들은 그걸 비밀로 하자고 서로 약속한 거예요. 마리에트가 방에 있으면 에밀리는 꼼짝없이 저 의자에 앉아 앞만 바라보겠지만, 마리에트가 나가면 책도 읽고 방 안도 돌아다니고, 또 창밖을 내다보기도 할 거예요. 그러다가 발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의자로 달려가 앉아서는 내내 거기 있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거죠."- P33
"잘 참기로 아빠랑 약속했거든. 꼭 그렇게 할 거야. 누구나 참고 견뎌야 해.군인들을 생각해봐! 우리 아빠도 군인이야.전쟁이 나면 아빠는 긴 행군도 목마름도 깊은 상처도 참아야 해. 그러면서 아프다는 말도 안 해.단 한 마디도."- P51
"우린 똑같아. 나도 너처럼 어린아이일 뿐이야.내가 너로 태어나지 않고 네가 나로 태어나지 않은 건 우연히 일어난 사고 같은 거야!"- P78
"이따금 난 내가 공주라고 상상해. 공주답게 행동하려고 공주인 체하는 거야."- P89
베키는 고된 노동으로 점철된, 비참하고 짧은 생애 동안 웃음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 채 살았다. 세라는 아이를 웃게 했고, 아이와 함께 웃었다. - P93
어먼가드가 물었다. "여기서 사는 거 괜찮아?" 세라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곳으로 상상하면, 견딜 수 있어." 세라가 대답했다. "아니면 이야기 속 장소로 상상하거나."- P145
"여기는 아주 작고 높아서 나무 위 둥지 같은 곳이야. 천장이 비스듬한 것도 재미있지. 저쪽 끝에서는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설 수도 없어. 날이 밝잖아, 그러면 침대에 누워 집우 위 저 평평한 창문으로 하늘을 곧장 올려다볼 수 있어. 그땐 하늘이 네모 모양으로 잘린 것 같아. 햇살 사이로 작은 분홍색 구름이 떠가면 꼭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생생해. 비라도 내리면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는 게 마치 근사한 말을 들려주는 것 같아. 별이 뜨면 침대에 누워 저 네모 속에 별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세어볼 수도 있어. 셀 수도 없이 별이 많아. 모퉁이에 있는 작고 녹슨 난로 받침쇠는 또 어떻고. 광이 나도록 잘 닦아서 불을 지피면 얼마나 멋질지 한번 상상해봐. 이제 알겠지, 여기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P153
"이야기가 맞아." 세라가 맞장구를 쳤다. "모든 게 이야기야. 너도 이야기고, 나도 이야기야. 민친 교장도 이야기지."- P164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난 안전해져. 많이 연습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어. 나도 요새 연습을 많이 했더니 예전보다 쉬워졌어. 상황이 끔찍할 때는, 정말이지 너무 끔찍할 때는 스스로 공주가 될 수 있다고 골똘히 생각에 집중하는 거야. 그러곤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려. ‘난 공주야, 난 요정 공주야. 난 요정 공주니까 누구도 날 아프게 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 없어.‘ 이게 어떻게 현실을 잊게 하는지 넌 모를 거야." -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