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다 보니, 예술가의 삶을 다룬 또 다른 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로 오스트리아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의 ‘몰락하는 자(Der Untergeher)’이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친구였던 서술자 ‘나’, 그리고 베르트하이머가 이상적 예술 앞에서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피아노 연주를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어느 날 글렌 굴드라는 천재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재능과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 글렌의 옆에서 두 인물이 힘들어하는 부분의 묘사가 굉장히 깊은 인상을 준다.
‘피아노 대가의 길, 아니 음악을 통틀어 봤을 때도 베르트하이머와 나를 죽인 사람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글렌이었어,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와 내가 피아노 대가가 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때 이미 글렌은 피아노 대가로 가는 우리의 길을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호로비츠 수업이 끝나고 몇 년간은 우리가 대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지냈지만 사실 글렌을 만난 순간 이미 그 가능성은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에는 ‘몰락하는 자’에서의 글렌 굴드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깊이 있는 예술', 즉 이상적인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깊이에의 강요가 독자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 중 하나인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라는 질문에 ‘몰락하는 자’는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저 나 자신이기를 바랐던 반면 베르트하이머는 평생 계속되는 절망에 이를 정도로 다른 사람이기를, 즉 자기가 봤을 때 삶이 순탄하고 잘 풀리는 사람이기를 원했어. (중략)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그럴 줄 몰랐던 거야, 난 생각했다. (중략)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나는 생각했다.’
서술자인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질투와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해버린 것이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깊이에의 강요’에서 젊은 예술가가 자살을 택한 것도 자신의 예술에서 남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평론가와 대중을 포함한 모든 타인들이 강요하곤 하는 ‘깊이 있는 예술’은 결국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 타인의 욕망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다.
예술가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 하는’ 모든 예술은 자신의 욕망과 세계관에 기초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욕망, 타인의 세계관과 예술가의 욕망이 비슷한 방향을 띠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특정한 예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저 그 예술 작품에 담긴 예술가의 방향성이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의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화가들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빈센트 반 고호의 작품이 생전에는 냉대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타인이 말하는 ‘깊이’ 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며 또 쉽게 바뀌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깊이’의 문제는 예술과 평론의 문제를 벗어나 나-타인과의 관계로도 확대 가능하다. 인간이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언행은 타인에게 노출되어 그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 필연적으로 타인의 평가에 둘러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으려면, 곧 남들의 시선과 평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태도는 이 ‘타인이 말하는 깊이’ 와 ‘나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