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짊어지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세기가 20세기라면 그 어려움은 배가 된다. 20세기에는 인류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은 큰 두 번의 전쟁과, 그에 뒤따른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사상가, 역사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20세기를 아주 짤막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에 의하면 인류가 지나온 20세기는 '어두운 시대(dark times)' 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원제 Men in Dark Times)>는 이 '어두운 시대'를, 20세기를 살아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카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렌달 자렐, 마르틴 하이데거, 로베르트 길벗, 나탈리 사로트 그리고 위스턴 휴 오든까지 총 13여 명에 달하는 이들을 다룬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20세기의 사상, 사조, 역사를 변화시켰으며, 그들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한 명 한 명이 (서구) 사상사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 '어두운 시대'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반대로 그들이 20세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들이 이 책의 주된 탐구 방향이다.
한나 아렌트는 해당 인물이 남긴 저작물, 편지, 강의록, 연설 등은 물론이고 인간 관계, 개인적인 비화까지 수집해 나가며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20세기를 살아 나갔는지'에 주목한다. 물론 아렌트의 연구가 이 정도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는 20세기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 사회 분위기, 국가간의 정치적 긴장, 각 인물들이 속해 있었던 공동체의 특성 등 다양한 맥락을 짚어 가며 인물의 삶을 되돌아 본다.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그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 그리고 베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중략)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해안으로 표류하듯이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표류한 사람처럼 보였다."
본문 중에서
어떤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식물이 주변의 흙과 물을 빨아들여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자라나듯, 어떤 인물의 사상과 언행은 시대, 역사, 그리고 문화적인 배경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 면에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인물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20세기라는 광기의 시대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다. 인물의 삶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시대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된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며 생각난 작품이 하나 있었다. 알란 베넷(Alan Bennett)의 희곡 <히스토리 보이즈(History Boys)>다. 이 연극은 1980년대 영국 고등학교의 '옥스브릿지(Oxbrige)' 대비반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옥스브릿지'가 영국의 유명 대학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의 줄임말인 것을 생각해 보면, 연극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한국으로 치면 소위 'SKY' 대비반인 셈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젊은 선생님 어윈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
Irwin : Why do we not care to acknowledge them? The Cattle, the body count. We still don't like to admit the war was even partly our fault because so many of our people died. A photograph on every mantelpiece. And all this mourning has veiled the truth. It's not so much lest we forget, as lest we remember. Because you should realize that so far as the Cenotaph and the Last Post and all that stuff is concerned, there's no better way of forgetting something than by commemorating it.
어윈 : 왜 우리는 이걸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 소 떼, 시체 더미. 우리는 전쟁이 일부는 우리 책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 우리 국민이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야. 집집마다 벽난로에는 죽은 가족의 사진이 하나쯤 놓여 있거든. 이 모든 애도가 진실을 가려 버린 거지. 이건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야. 기념비나 추모비가 세워지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는 것만큼 그것을 잊어버리는 데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란다. 그걸 알아야 해.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중에서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애도의 태도를 버리고, 심사위원들의 눈에 띌 만한 객관적이고 새로운 관점으로 20세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돌아보라는 것이 어윈의 주장이다. 어윈은 "요즘 시대에 역사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퍼포먼스고, 오락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고까지 이야기한다. 글쎄, 어쩌면 그의 말대로 대학의 심사 위원들은 똑같은 내용의 에세이를 몇 십 장, 몇 백 장을 읽느라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애도의 시선을 걷어내고, 희생자와 사상자를 '사람 이전에 숫자'로 대하는 방식이 심사 위원들의 눈길을 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대학 입학 이후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정한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숫자 이전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철저히, 집요할 정도로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이 책이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20세기 역사와 사상의 흐름에 대해 평소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을 돕는 돋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열 세 명의 인물들에 대해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번역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번역은 읽었을 때 걸리는 부분 없이 쏙쏙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곳곳에는 우리말에 잘 쓰이지 않는 수동태 문장이나 영어식 복문 등이 보인다. 번역의 의미는 외국어로 쓰여진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 출발어(외국어)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도착어(한국어)다. 외국어 그 자체를 오류 없이 해석해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실한 번역이 되지 못한다. 우리말에 쓰이지 않는 표현이나 어색한 문장 구조 탓에 책의 내용이 이해가 어려운 지점이 몇 있었다. 물론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의 20세기와 그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소개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다음 책에서는 조금 더 명료한 번역을 통해 아렌트의 사상과 연구를 만나볼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그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 그리고 베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중략)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해안으로 표류하듯이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표류한 사람처럼 보였다.-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