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노인들의 말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사라진 종족이 수천 년 전에 써놓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령했다.
왜냐하면 무지의 골짜기에서는 오래된 것은 무엇이든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감히 조상의 지혜를 반대했다가는 다른 모든 올바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평화를 지켰다. -p.8
'우리'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었다. 잘못 되었음을 직감한 이들은 '우리'였고, '우리'는 바로 잡고자 했다. 태극기를 가방에 달고 나이든 몸을 이끌고 나온 '어르신'들은 종종, 촛불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한 어르신들의 모습은 거리에서도,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누군가의 sns에서도 쉽게 목격되었다.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 책을 읽으며 처음 떠올린 것은, 그 때의 '우리'였고 그 때의 '어르신'들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면 읽어나갈 수록, 어디선가 듣고 보았던 이 문구가 (정확하지 않지만)떠올랐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에 대비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오래된 것은 무엇이든 존경받아 마땅하고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옳은 것일까.
이 책의 저자 반 룬은 아마도 지난 역사 속에서 자신이 본 여러 아픔들에 안타까움과 애정을 가지고 이러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된 것도 새로운 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항상 '힘(권력)'이 가진 것을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조심하여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말기를. 파국으로 치닫는 '무지'가 아닌, 지혜롭게 나아가는 '관용'을 발휘하기를.'
초대 기독교인들은 행위의 원을 완벽한 동그라미로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 p.137
그런데 이들의 작은 공동체들이 하나의 단일하고 강력한 조직으로 통합되자마자, 과거 영적인 원의 완벽한 조화는 새로운 국제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임무와 의무로 인해 거칠게 와해됐다. -p.138
반 룬은 이 책에서 세계사를 말하지 않는다. 사실, 유럽의 종교를 통해 '인류사의 아픔(또는 실수, 잘못, 잔인함이 될 수도 있겠다.)'을 말하고 있다. 왜 하필 반 룬은 종교사를 풀어내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보여주었을까. 책을 덮고 한참을 고민해보았다.
반 룬은, 개인이 모여 공동체가 되었을 때 발생되는 잘못 된 신념들과 그것이 힘을 가졌을 때의 무서움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가장 순수하고 진실된, 완벽한 원 상태여야 하는 '종교' 조차도 근본을 잃어버리는 모습들을 보여주며 더욱 진실되게 전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 무서움들이 실제로도 존재했으며, 그것이, 모든 개인이 사회가 되고, 사회가 국가가 되고, 국가가 세계가 되고, 세계가 우주가 되는 과정 속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음을 말이다.
사람들이 가장 진실되다 믿는 '종교'를 통해, 인류사, 그러니까 인간이 저지른 수많은 실수와 잔임함을 말한 것은, 이 책이 1925년에 처음 발행되었다고 본다면 참 파격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본 제목이 <관용>임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걸맞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情)'이라는 단어를 외국어로는 그 어떤 단어로도 정확히 번역하지 못한다는 것 처럼 '똘레랑스'가 '관용'이란 단어로 충분히 번역되었는가는 아직 조금 의문스럽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독자로서 편집자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다. 좋은 책을 널리 읽히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 천번 이해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 무리하게 어울리지 않는 제목을 붙이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자칫 이토록 훌륭한 책의 진실된 의미가 퇴색되고 제대로 읽히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세계사'라니. 뒤에서 역자가 왜 책의 제목을 세계사로 하였는지 밝히며 양해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참 별점 주기 아쉬운 제목이다.
세상의 만물은 조직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조직을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조금이나마 일을 성취하려면,
결국엔 '조직해체촉진위원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 p.152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오롯이 '홀로' 살아갈 순 없다. 결국엔 '조직'이 이루어지고, 하나의 조직을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야만 한다.
인터넷 뉴스 기사의 댓글이나 sns에서도 이런 조직화 되려는 경향은 쉽게 목격 된다. 자신이 선택한 한 쪽에 치우쳐 무리를 이루고 자신의 무리를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지키고자 다른 한 쪽의 무리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모습들은 매일 심심치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에서 부터,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고 속한 조직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을 발휘한다.
그 순간부터 혁명은 공포 정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굶주린 민중이 자기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적에게 팔아넘기려는 엄청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철학자들의 점진적이고도 발전적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 그처럼 거대한 위기 상황이라면 권력은 사악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의 손에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은 역사를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 p.447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힘을 가진 자는 끊임없이 더욱 강해지고자 한다. 가진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잔인해지고 무자비해진다. 관용따윈 없는 것이다.
그로인해 희생되는 수 많은 약자들. 그 약자들의 곁에서 탄생하는 '아직은 순수함'을 지닌 자가 권력에 맞서는 혁명. 잠시동안의 관용. 또 다시 권력을 쥐게 된 누군가가 가지게 되는 욕망과 무자비함. 또 다시 그 욕망과 무자비함에 맞서는 혁명. 그리고 다시 관용. 우리의 역사는 항상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부드러움과 빛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인류는 오직 한 가지, 야만적인 힘만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후라면 나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학적 실험실에서 했던 모든 실험 중에서도 가장 위대했던 프랑스 혁명이 시끄러운 폭력의 극치였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인다. -p.448
역사의 반복 속에서 본다면 문득 진보와 보수가 무슨 의미인가, 모든것은 부질없는 것일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이기적이고도 잔인한 부패한 권력일까. 라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반 룬은 보수와 진보가 끊임없이 다투며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읽어도 소름끼치게 맞아 떨어지는, 이 책의 말미에 반 룬이 툭 던지듯 적어둔 아래의 글이. 나는 참 소중하다.
우리가 요즘 너무나 많이 듣는 절망의 악순환("인간은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인간은 언제나 그런 존재일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4,000년 전과 똑같이 그대로이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의 착각이다.
진보의 노선은 종종 중단되기도 한다. 모든 감정적인 편견을 접어두고(고체적인 증거를 다소라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간인) 지난 2만년 동안의 기록을 근거로 냉정하게 판단해보자. 그러면 거의 말로 할 수 없는 야만성과 미숙함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지나간 일들보다 끝없이 더 고귀하고 더 좋은 앞날을 약속하는 상태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p.483
한 번 읽어서는 반 룬의 생각과 이 글을 쓴 의도를 다 알아차리기란 절대 불가능한 책이다. 서평을 쓰기 전 두 번은 읽고 싶었으나, 곱씹으며 읽고, 읽으며 생각하다보니 한 번 읽기에도 참 벅찼다. 그럼에도 문장이 제법 잘 읽혀서, 반 룬의 필력도 놀랍지만 역자가 무척 애썻겠구나 생각한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들과 의문점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서평을 남기려니 고급 양주를 마시고 체한 기분이다. (술에 체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괴롭다.) 그래도 좋다. 혈액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강렬하게 뛰는 것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