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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는 물결』
_작가,독자,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K.르 귄 ㅣ 현대문학
SF-판타지 문학의 세계적인 거장 어슐러K.르 귄이 1988년부터 2003년까지 15년간 문예지 등에 발표해온 에세이, 문학 작품집의 해설과 서문 및 글쓰기 워크숍 강연 원고 등을 엮은 『마음에 이는 물결』은 독특하고, 방대하며, 예술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이라함은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이다. 문장마다 그녀가 사물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시선이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인 문제들], [독서], [토론과 의견], [글쓰기에 관하여] 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작은 가지를 뻗어나가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힘있는 목소리로 펼쳐내고 있다. 모든 챕터가 흥미롭고 쉽게 읽힌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신선하고, 또 어떤 챕터는 너무나 재미있고, 공감이 간다. 그건 그만큼 여러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판타지 문학의 대가임을 증명하듯 독특하고 기발한 방식의 표현들과 사유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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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개하기] 챕터에서 그녀는 자신을 '남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여자'는 전혀 없었으며 여자는 최근에 만들어진 존재이고, 자신은 여자가 만들어지기 수 십년 전에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여자의 개념은 전혀 유통되지 못하였기에 사람은 곧 남자였고, 대명사는 남자의 것 하나뿐이었으며 그러니 본인도 남자라고 '그녀는' 말한다. (p.14) 신선하게 비판적인 문장들이며, 재치있게 신랄하다. 여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남성이 중심인 세상에 대한 그녀 방식의 풍자로 느껴진다. 자신은 남자이지만 일류급 남자는 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세상에 씨를 뿌릴 수도 없으며, 눈밭에 서서 소변으로 이름을 쓰지도 못하고, 어니스트 훼밍웨이처럼 짧은 문장을 쓰지고 못하기에 그녀는 자신을 이류급 남자이거나 모방품이라고 말한다.하지만 그녀는 남자가 되려고, 훌륭한 남자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남자'가 되는 것에 영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그냥 늙은 여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p.21) 난 한번도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들이 중심인 사회 안에서 '여자' 임을 그것도 '나이 많은 여자'임을 망설임없이 가볍게 시도해보겠다고 함에 통쾌함은 느낄 수 있다.
[모든 행복한 가정] 챕터에서 르 귄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에게 딴지를 건다. 그리고 그녀의 딴지는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멋지다. 르 귄은 [안나 카레니나]의 위대한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를 지적한다. 과연 톨스토이는 모든 계층의 가정을 면밀히 보고 그들의 행복이 '똑같다'고 말한 것일까라고 그녀는 의문을 제기한다. '행복'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다양한 감정 위에 존재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그냥 '행복한 가정' 이라고 뭉개버린 대문호의 방식이 르 귄은 거슬린 것이다. 또한 문학에서 '행복'을 다루는 글에 대해 진부하고 감상적이라는 평론가들의 평가와 여자들이나 보는 소설로 무시당하기에 행복이 문학에서 가볍고, 열등하고, 흥미롭지 않게 다루어지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녀의 해석과 지적에 나또한 반성한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지 않고, 비판적이지 않은 말랑하고 보드라운(p.68)글에 대한 나의 얕은 견해를 완전히 꼬집는 문장들이었다. 행복은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쉽고, 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불행만큼 복잡하고, 심오하고, 손에 넣기 힘들며 이례적인 것이 행복이다.(p.67) 깊을 수록 가볍고, 넓을 수록 맑을 수 있음을 르 귄의 사유에서 깨달았다.
두 번째 주제인 [독서] 부분이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가장 흥미로웠으며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환상 문학'의 미래가 탄탄함을 이야기하며 그녀가 열거한 이탈로 칼비노,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필립K.딕,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가 열거한 모든 작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열광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표현된 그녀의 사유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단시간에 모든 문장을 휘리릭 읽으면 안 된다. 두고 두고 한 챕터씩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 생각하고, 느껴야 온전히 르 귄의 상상력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르 귄 사후 만나게 된 소중한 문장들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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