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아니 표지를 왜 이렇게 잘 뽑았어!'(좋으면 괴성부터 지르는 편) 하며 망설임 없이 구매했던 책. 《아무튼, 장국영》은 장국영과 대화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장국영 옆의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팬심 하나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저자가 장국영을 회고하며 쓴 에세이다.
책은 저자의 귀엽고 열정 넘치는 덕밍아웃의 연속이다. <영웅본색2>의 애절한 공중전화 부스 신에서 장국영을 처음 만난 이래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꺼거의 통역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대학교, 대학원까지 중어중문학과로 간 저자는 잠시 외도(회사생활을 했다.)를 하긴 했지만 이내 상하이에서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땄다. 학위 논문 치사에는 나를 박사로 만든 건 8할이 장국영이라며 꺼거에게 감사 인사를 썼고, 현재도 팬심을 숨기지 않고 중국어 예문에 열심히 장국영 이름을 넣고 장국영 가사를 해석하는 수업 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을 포섭(?)하고 있다. 노영미(장국영 팬들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 팬들을 가리킴)로서 장국영이 사망한 뒤 그를 좋아하게 된 후영미를 연구하는 장국영 팬덤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영화, 음악, 생애를 꿰뚫고 있고 홍콩과 상하이를 거닐며 꺼거 투어를 했던 저자의 이메일이 아이꺼거(사랑해오빠. 꺼거는 장국영 애칭이다.)인 것과 그의 영어 이름이 레슬리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春夏秋冬该很好, 你若尚在场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마나 좋을까, 그대가 여전히 함께 한다면]
나는 지금 이 책에서 언급한 장국영의 ‘춘하추동’을 들으며 독서록을 쓰고 있다. 장국영의 유명한 영화는 다수 봤기에 나름 배우 장국영에 대해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여태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았다. 그의 노래를 각잡고 들어본 것도 처음이다. 발음도 어려운 외국어 가사지만 멜로디만큼은 이상하게 익숙하다. 노래를 가만 듣고 있자니, 90년대 필름 속에 스르륵 들어와 앉은 기분이다. 참으로 다재다능했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떠난 지 열일곱 번의 춘하추동이 지났다. 올해 2021년은 벌써 햇수로 18년째가 된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더 좋아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버린 꺼거가 그는 참 야속하다. 비록 통역사는 되지 못했지만 꺼거로 인해 배운 중국어를 요긴하게 써먹으며 이만큼이나 성장했는데 종국에 꺼거는 기다려주지 않았기에, 때때로 사무치게 그립다. 저자가 애타는 마음과 그리움이 뚝뚝 어린 문장을 쓸 때마다, 꺼거가 머문 과거가 보일 때마다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저자의 치열했던 지난 삶 속에 음악이건 영화건 프로페셔널했고 반짝반짝 빛났던 장국영이, 시대가 저무는 홍콩 영화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던 장국영이 보였다. 저자의 말대로 저자가 살아온 지난 17년은 장국영이라는 참 예쁜 리본이 달린 선물 같은 삶이었다. 누군가의 팬이었던 나의 마음도 하루종일 흔들렸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참 강하다.
[누군가는 꺼거의 얼굴이 평생 어린 왕자 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면 속 40대 초반의 꺼거는 특유의 천진하고 해사한 얼굴에 어느덧 세월의 혼적과 삶의 연륜이 열게 묻어났다. 마냥 순수하고 해맑지만은 않은 모습. 이제는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이 좋다. 다만 거기서 멈추었다는 것이 시리도록 서글폈다.]
저자의 위 문장대로 장국영의 마지막 얼굴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마냥 어린왕자 같지는 않다. 마흔이라는 나이답게 주름이 졌고, 더욱 우수에 젖어 있다. 최근 그의 마지막 영화 <이도공간>이 개봉되어 포스터를 찾아 보았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 없이 ‘그의 마지막 영화’라는 카피에 한참 시선이 머물며 가슴이 아려왔다.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많고, 지금도 계속 꺼거의 후영미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그가 멀리 그곳에서라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다만 너무 시대를 앞선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때의 홍콩은, 그때의 세상은 새로운 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불과 17년 전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자존심 강하고 섬세한 완벽주의자에게 쉽지 않은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은 타협하고 살아도 괜찮았을 텐데, 조금은 덜 완벽해도 좋았을 텐데···.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조금은 망가진 모습이어도, 우리는 괜찮았을 텐데···. 전설이 되고 싶다던 그는 그렇게 정말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