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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의 서재

이모가 내 이름을 낮게 불렀을 때, 나는 누운 채로 우재가 나에 대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아시죠? 해미는 가까워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이지 않는 거.’ 우재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거운 추가 되어 나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우재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었고, 내가 그렇다는 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P-1
"그 사람은 왜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마당엔 장작이 쌓여 있고 찬장마다 피클이며 잼이 가득 쟁여져 있었어.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겨울까지 살아 있었을 테지. 창고 앞에 쌓아둔 장작이 다 없어질 때까지. 나뭇가지마다 다시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들을 따다 만든 잼을 또 다 먹을 때까지. 그 사람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죽은 거였어.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나를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했단다."- P-1
"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 P-1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1
몇 년 후엔 한수도 우리 가족처럼 다시 웃을 수 있게 될 테지. 하지만 웃는 순간에도 상실의 고통은 사실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P-1
이모와 셋이 함께 본 날 이후에도 우리는 드문드문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우재의 답은 늦거나 짧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우리 사이의 무언가가 틀림없이 훼손되었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P-1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P-1
우재는 잘 있을까? 우재에게서는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멀어지고 마는 걸까? 내 곁을 스쳐간 지난 인연들처럼. 책상 위에서 진즉 시들어버린 수국을 생각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번져갔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P-1
만약 최장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녀의 표현이었다. "걱정 마요. 내가 오지랖이 넓은 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유일한 단점이자 장점이니까."—나는 크게 낙담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최장로는 시간이 많았고—이 역시 그녀의 표현이었다. "할일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잘됐지. 어차피 트로트 가수 나오는 방송이나 보고 있었는데 뭘."—흔쾌히 자신의 오빠—그는 교회에 다닌 적이 없다고 했다—에게 바로 연락해 그 후배가 누구인지를 물어봐주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조금 얼떨떨했다. 마치 급물살에 휘감겼다가 뭍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설마 정말 이렇게 K.H.를 찾게 되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일어난다고?- P-1
"최장로가 도움이 될 줄 알았지. 최장로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단점이자 장점이 오지랖이 넓은 거니까."- P-1
우재는 계속 ‘배려’라고 말했지만 우재가 알지 못하는 건 그해 늦봄 우재를 위한 마음으로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 그건 무엇이었을까? 어둑해진 천변에서 우재가 덮어준 재킷의 온기를 느끼며 그건 누구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일 뿐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재는 몰랐겠지만, 그후로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은 내가 그날 이후 조금씩 우재의 연락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피했다고?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나에게 다가와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우재로부터.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져서."
우재의 긴장한 듯한 목소리를 듣자 어둡고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이대로 도망쳐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 거야?- P-1
생각해야 해. 내 안의 누군가가 다시 속삭였다. 생각해야만 해.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더이상 도망치기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P-1
"아가씨의 전화를 받고, 옛 시절 생각에 꽤 오래 잠겨 있었어요. 잊고 산 줄 알았던 기억인데, 한번 그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 거기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더라고요. 교회에 다니던 시절은 저에겐 무척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시절이 시절인 만큼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무신론자가 되어 더이상 교회에 발도 붙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었죠. 신앙심이 깊어서라기보다는 거기에 가야 여자애들과 교류도 하고 문화생활이란 걸 할 수 있었으니까요."- P-1
나이를 먹으면 어떤 기억들은 더없이 생생해지기도 하는데, 임선자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아마 임선자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임선자는 뭐랄까, ‘평범’이란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아, 저렇게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모난 데 없이 평생 살겠구나, 싶은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 친구가 보잘것없는 삶을 살 거 같았다, 뭐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평범한 삶은 축복이지요. 내 나이 정도가 되면 다 알아요.- P-1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받는다면 답장을 해주거나 내게 전화를 해주면 안 될까? 아래에 내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둘게. 너와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이 너무 불안하니까 짧게라도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어. 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누구든 연락이 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쉽게 두려워져버리거든.- P-1
당연하게도 우재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피곤한 탓인지 우재에게 연락을 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우재는 잘 있을까? 우재와 천변 벤치에 앉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밤으로부터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날 밤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는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며, K.H.를 반드시 찾아낸 뒤 내가 먼저 꼭 연락하겠다고 말했을 때 괴로운 듯 오래도록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우재는 이내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손잡는 데만 십구 년 걸린 거 알지. 그렇게 또 기다리게 하면 우리 환갑이다."- P-1
"아가씨가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긴긴 세월 지나 과거의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건 틀림없이 근사한 일일 테지요."
카페 앞에서 헤어지면서 이영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게 꼭 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한 문집들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이를 위해 선선히 자신의 시간과 물건을 내어주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P-1
"한 해의 끝에서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인생의 곳곳에는 들판에 숨어 있는 제비꽃처럼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하다"- P-1
종착점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P-1
마침내 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왔다. K.H.를 만나 선자 이모의 일기장과 편지를 전해주고 나면 속죄가 완성되고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그런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 위로, 일기에서 본 것인지 내가 상상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확인할 길 역시 더이상 없는 어떤 장면 속에서 선자 이모가 천근호의 모습을 닮은 어린 소녀와 아카시아가 핀 둑길을 걷는 모습이 그려졌다. 옷깃을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양갈래 머리를 한 천근호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선자 이모. 이제껏 걸어온 여정의 종착지가 여기였다니.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P-1
게다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 신앙을 갖고 자란 저는 세월이 흐를수록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저는 제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나 통제할 수 없는 끌림이 건실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면 한때의 바람처럼 지나갈 거라고 믿고 싶었지요. 선자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는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남편과 미국의 명문대로 유학 간 아이들. 남들은 저의 삶을 부러워했고, 저 역시 커다란 굴곡이나 파고 없이,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펴면 될 정도의 근심만 있는 내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산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선자의 일기를 읽고 내가 살아오는 내내 마음 한편에 선자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사는 듯한 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재로 덮어버려 진즉 꺼뜨린 줄 알았던 불씨가 아직도 타고 있다는 사실에 회한이 밀려와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났습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요.
선자에 대해 품었던 마음을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글을 쓰는 지금 저는 무척 떨리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선자의 일기를 읽어나가며, 행간에 숨겨진 진실들을 짜맞춰 나를 찾아왔다는 당신에겐 나와 선자 사이에 존재했던 것을 감추려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선자의 일기들과 편지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잘 보관하려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 아이들에게 함께 태워달라고 말할 거예요. 선자가 이런 식으로라도 나에게 전했던 마음들을 나는 이제라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생전에 아이들에게 선자와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고,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선자가 소중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제게는 제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걸 선자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해미씨,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당신도 더는 나를 절대 찾지 말아주세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이렇게 메일을 쓰는 것은 다시는 찾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긴긴 시간 동안 나를 찾아 헤매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에요.
해미씨, 당신은 나에게 선자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전해주었죠? 테이프가 봉해진 상태를 봤을 때 당신은 선자가 쓴 편지를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도 착하고 마음 여린 아이였던 당신은 거짓말로 편지를 썼다는 죄책감 때문에 미안해서 몰래 편지를 훔쳐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겠죠. 저는 선자가 쓴 편지를 당신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이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편지를 읽어봤는데, 선자의 마지막 편지는 나에게 쓴 것이지만 동시에 어렸던 당신에게 쓴 것처럼 읽히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부디 내가 스캔해서 보내는 이 편지를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죄책감을 씻어버리기를 바라요.
다시 한번, 영영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선자를 내게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 당신이 살아갈 모든 날들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며.- P-1
물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1
처음엔 한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는 동안 나 역시 기적을 꿈꾸며 행복했단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P-1
이제는 얼굴에 기미가 생긴 동생과 고구마를 구워 호호 불어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나는, 해나가 나보다 훨씬 어려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슬프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단정해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미안해. 나는 오랫동안 나만 괴로운 줄 알았어."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사과하자 해나는 웃으면서 "언니,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중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은 사과를 할 수 있는 거고."- P-1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수를 구원해주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구원하고 싶었던 건 정말 한수였을까?- P-1
이 책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잘 가닿아 눈부신 세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었으면.-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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