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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의 서재

전화 통화는 자주 했지만 거의 세 달 만에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살짝 긴장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게 우재를 만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 때문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P-1
"게다가 대학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정말 아픈 사람들이거든." 정말 아픈 사람들은 대개 정말 불친절하기 마련이었다. 반말을 하는 건 예삿일이고, 약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심지어는 약국 건물 화장실이 더럽다고 우재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서 시달렸던 거에 비하면 여기서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박카스 뚜껑 왜 안 따주냐고 소리지르는 할아버지 정도는 귀엽잖아."
우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지만 나는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P-1
술을 강요하고, 벌칙게임을 하고, 다 같이 구호를 외치게 했던 학과 선배들과 달리 ‘문학’ 동아리 선배들이라면 후배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동아리에 가입했던 나는 실망해서 그날 밤, 남들이 다 자는 사이 집에 가려고 짐을 챙겼다. 가는 길을 모른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장소와 그 사람들 틈을 벗어나는 것만이 그 순간 내겐 중요했으니까. 내가 사람들의 흥을 깨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여기에도 내 자리는 없다는 익숙한 감각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나를 찔렀다.- P-1
"넌 진짜 늘 혼자 있었는데. 막상 말 시키면 할말 다 하니까 그렇게 수줍음이 많거나 한 것도 아니면서, 말을 먼저 거는 법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한테 묘하게 벽을 치고. 선배들은 다 널 좀 어려워했지만, 이상하게 난 처음부터 네가 어렵진 않더라. 어쩌다 한 번씩 네가 속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고."- P-1
나는 그를 무신경하고 조금 유치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는 지역에 따라 밥을 사줄 후배들을 대놓고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야, 넌 대치동에 사는데 나한테 밥을 사달라면 어떻게 해. 네 돈 내고 먹어. 넌 고향이 상주랬지? 그럼 따라와. 하지만 우재의 기억 속에서 그 선배는 착실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재와 함께 토요일을 보내고 난 다음날, 나는 숙취로 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며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더더욱.- P-1
정신적인 기쁨을 물질적인 기쁨의 우위에 두는 인생을 살 것.

마리아 언니가 내게 보이프렌드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언니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모두 언니를 웃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랑에 빠졌던 걸까.
나를 매혹했던 건 너의 낮은 목소리, 총기, 하모니카로 연주해주던 <등대지기> 노래.- P-1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내 쪽에서 먼저 선자 이모의 일기를 언급하는 일도 생겼다. 여전히 과거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자 이모의 일기장 내용을 우재와 공유하고 만 건 뒤죽박죽인 내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1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P-1
이곳의 가을은 둔중한 안개 때문에 음습하고 우울한데 오늘은 너무도 드물게 한국의 가을처럼 하늘이 청명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병원 앞마당을 걷고도 아쉬워 인근의 묘지공원까지 가 산보를 했다. 나무들은 이미 색색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고, 가을꽃이 무성한 묘지 위로 태양이 햇빛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너도밤나무 아래서 빵을 먹으며 책을 보는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밝고 건강한 몸과 정신……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신이 만든 찬란한 빛깔 앞에서 울고 싶어졌다.- P-1
간간이 한두 줄을 끼적여놓았을 뿐인 그 시기의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 선자 이모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밥을 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 듯했다.- P-1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괴로워했던 걸까? 일기장에서 생략된 날짜들은 짤막한 일기마저 쓸 수 없었을 선자 이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나는 일기가 쓰인 날부터 그다음 일기까지의 비어 있는 날들을 헤아려보았고, 그 간격이 유독 길어진 시기엔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을 선자 이모를 상상하며 마음이 아팠다.
카페에서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을 때 나는 대체로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한번은 "이렇게는 계속 살 수가 없다. 이 괴로움 속에서도 나는 내 삶을 근사하게 살아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나의 임무니까"라는 문장이 적힌 1977년 2월 1일자의 일기를 읽다가 고개를 들고 밖을 보는데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는 창밖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져 현기증이 일었다.- P-1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까지 우재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P-1
"독일어로 증상을 잘 설명하지 못해도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니까."
이방인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경우가 많았다.
"외로움만큼 무서운 병은 없어."- P-1
이모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천변을 따라 거닐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선자 이모가 서명에 동참해달라고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법이 없고, 무엇도 잘 표현하지 않던 선자 이모가 사람들마다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부탁을 해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며.- P-1
내가 기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레나는 "잘 어울린다, 야. 너는 늘 글을 썼잖아"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이내 슬퍼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나를 원망하는 마음을 레나가 내비칠까봐 불안해졌지만 레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질 않았다.
"그때 그런 이유가 뭐냐고 왜 묻질 않니?"
결국엔 내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레나에게 물었다.
"그랬나? 이젠 기억도 안 나."
나는 레나의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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