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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더 배워가는 신학생
  • 칼뱅
  • 브루스 고든
  • 29,700원 (10%1,650)
  • 2018-12-10
  • : 277

“우리는 칼뱅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첫 질문이 모호하면서도 도발적이라서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하지만 나는 조국교회를 볼 때마다 이 질문 앞에 답답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한국교회 내에서 장로교의 교세는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교세를 제외하더라도 상당수의 개신교인들은 장로교의 전통, 나아가 장로교의 신학을 지탱하는 “칼뱅”이란 인물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성결교 전통의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동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필자 또한 신학교 초년생 때 가장 먼저 한 독서는 루터 저작에 대한 요약집과 더불어 칼뱅의 기독교 강요 요약집(혹은 라틴어 직역본)이었다는 것을 보자면, 칼뱅이란 신학자는 장로교를 넘어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칼뱅을 누군가는 신격화하고, 누군가는 그의 삶을 폄하해왔다. 중립적이란 표현은 유명무실했고, 그의 삶을 그 자체로 보려는 자정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동감하며 반성할 뿐이다. 필자도 돌아보면,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만하단 생각으로 인해 칼뱅이란 인물 자체의 삶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기회가 되어 이번 신간 <칼뱅>을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편견의 시선을 돌이켜 “개신교 신학의 선구자 혹은 출발자” 정도로 치부하던 타 교단의 신학자 칼뱅에서 (책 옆면의 문장처럼)“신앙의 자유를 위해 제네바로 향했던,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투쟁자” 칼뱅으로, 그의 열정과 개신교회에서의 확고한 그의 위치를 인정하고자 한다. (물론 내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칼뱅은 개신교회 역사상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 중 한 명이지만, 존 웨슬리에서 마틴 냅으로 이어지는 한국성결교회의 신학 계보에서 칼뱅의 위치는 어떠한지 묻는다면 오히려 또 다른 종교개혁자 루터보다도 그 연관성을 이야기 하는 이들이 적을 것이다. 이 부분이 각 교단별로 대화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갈림길이라 본다. 우리는 칼뱅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전체라 말할 수 없지만, 조국교회 내에서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신학도들의 배타성과 칼뱅을 “제네바의 도살자” 정도로 폄하하던 (나를 포함하여) 신학도들의 편견과 무지는 칼뱅의 사역과 삶을 공평하게 볼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결단코 온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의 삶이 수많은 비판점과 논쟁거리로 가득하다는 점은 이 책의 저자 “브루스 고든”또한 매 장마다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는 “온전할 수 없었던 한 인간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일생”을 보여준 개신교 신학과 스승이자 믿음의 선배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허락하셨는데, 격동의 종교개혁 시대에도 여전히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칼뱅의 투쟁과 더불어 그가 지녔던 여러 부족한 점들 또한 보이셨다.

 

저자는 머리말은 통해 “칼뱅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도구이자 어떤 경장자도 허용치 않는 교회의 예언자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 뿐 아니라 아나뱁티스트 등 복음을 나약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이들을 증오한 그의 태도는 이러한 자기인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여러 부족한 점을 그저 비판점으로만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가 지닌 마음가짐과 환경의 결과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들춰보는 것이야말로 그에게서 배울 점을 취하고, 그의 부족한 점은 어떻게 보완하여 개신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자세라 본다. 그의 부족한 점이 부끄럽다고 숨기지 말았으면 한다. 필자가 속해있는 성결교회 또한 존 웨슬리의 신학과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는 모두가 잘 알 듯이 그의 일생에서 눈에 띄는 실패와 더불어 현대 신학으로 보자면 비판점이 가득한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시대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자신의 최선을 일생을 통해 보였다. 그리고 존 웨슬리 이전에 태어난 칼뱅 또한 웨슬리 이전에 개신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할애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부정할 수 없는 우리 개신교회의 역사다.

 

우리는 신간 <칼뱅>을 통해 기존 칼뱅의 일생을 다루던 서적들을 새롭게 하는 최신 기록이자 그를 무오한 개혁자이거나 종교개혁의 수혜를 받은 학살자라는 무지와 편견을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2017년,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글이 쓰여진 2018년의 연말, 그리고 현재의 2019년. 조국교회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모습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500여 년 전 시작된 종교개혁과 그 이후 자신들의 일생을 다해 종교개혁을 완수하려던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가? 루터와 칼빈, 웨슬리 등 교단의 시작을 알릴 인물들의 이름만 남겨둔 채 그들은 지우고 “OO주의”라는 타이틀에 갇힐 것인가? 우리의 닫힌 지성과 마음은 결국 또 다른 종교개혁의 단초를 만들 것이다. 세상이 타락해서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 타락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소금과 빛(마 5:13-16)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잊지 않았으면 한다. 칼뱅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겠는가? 이 책 속에 칼뱅은 결코 온전한 자가 아니었다. 온전하지 못한 시기에 온전하지 못한 자였던 칼뱅.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열정, 복음의 열정으로 사로잡혀 그의 일생을 불살랐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오늘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전히 칼뱅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고서도 칼뱅이 무류한 존재로 느껴지거나, 학살자일 뿐이다 판단된다면 필자는 여러분의 생각을 좌지우지 할 권한이 없다. 다만 필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렇게 단정할 것이라 보지 않는다. 정말 이 책을 주님이 주신 지식과 지혜로 성심껏 읽는다면, 양 극단에 빠지는 무지와 오류는 얼마든지 수정 가능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확신한다. 필자 또한 칼뱅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오해를 이번 신간을 통해 고칠 수 있었다. 칼뱅을 이해하면서도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 “브루스 고든”의 모습은 탁월한 번역을 선사하신 “이재근 목사님”의 번역에 힘입어 우리의 마음에 분명한 찔림을 준다. 오늘 이 책, <칼뱅>을 추천하며, 이 책을 통해 교회의 회복과 일치를 위해 때로는 험한 말을 아끼지 않았던 칼뱅의 모습에서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예비 독자와 조국교회의 지체들에게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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