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이 나왔을때던가. 좌우간 매너놈이 수원 모처 기숙사 한 구석탱이에서 숫자놀음에 미친 짓거리 절반, 놀고 먹으며 음악 듣고 책 읽고 끄적이기 절반 하던 시절, 저 전형적 강남 아줌마에 대한 예찬이 끊이지 않는 걸 보고 갸우뚱할 무렵의 일이다. 칼의 노래 어쩌구 하는 제목따라 강금실이 (그당시) 몇 년전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서평을 쓴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웹 뒷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스물 다섯의 소년은 2001년 대한변협 신문에 실린 강금실의 칼의 노래 서평을 읽게 된다.
감상 어땠냐구? "???"
강금실이 쓴 칼의 노래 서평
http://www.koreanbar.or.kr/publication/index_read.asp?t_id=newspaper&idx=541&Page=1&strSearchList=Subject&strSearchWord=칼의%20노래
묘할정도의 기시감이 느껴져, 주말에 집구석 오자마자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찾아 p.208의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를 폈다. 다시 한 번 읽고 난 소년 매너, 개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실실 쪼갠다. "이런 썩을X..."
강금실의 서평 일부와 '자전거여행'의 p. 208 ~ 225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굵게 처리된 게 김훈의 글이다.
그에게 현실은 정치가 아니라 오직 바다였다. 그의 칼은 정치의 향방에 따라서 이동하는 세태가 아니라, 순전히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칼은 온전히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p. 210)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근원이었다. (p. 219)
김훈의 혼이 빙의되지 않은 다음에야 '물들이기'에 찍은 따옴표까지 똑같이 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자전거여행의 초판 1쇄 발행일은 2000년 8월 1일이다. 강금실의 서평은 2001년 8월 20일 변협신문 34호에 실렸다.
뭐. 매너 엄니 또래의 저 아낙, 머리 좋고 명민하며 옷잘입고 잘 놀 것 같은 '스타일'있는 건 인정한다. 근데말이지, 남의 글, 그것도 '저자의 소재에 대해 저자 자신이 직접 쓴'글 티 안나게 발췌하며 배낀 껍데기로 이어붙인게 그양반의 '스타일'이라면, 강금실의 지인들과 노빠들이 열광하는 그 '스타일'이면에 무엇이 있을까를 먼저 끄집어낸 다음에 열광이든 무시든 하는게 맞지 않을까.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