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읽고 쓰기
  •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 퍼트리샤 록우드
  • 17,820원 (10%990)
  • 2024-07-24
  • : 903


  각종 밈과 쏟아지는 숏츠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뉴스 만으로는 이제 세상을 놀래킬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보다 개개인이 중요해진 시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먼저 포털을 맞이히는 시대에서 진짜 삶은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일까. 시인이자 작가인 록 우드는 현 사태에 대해 비판이나 교훈을 준다기 보다는 보여주고, 표현한다. 이걸 봐, 우리가 이러고 있잖아.






 

  시인의 과감한 시적인 표현이 불온하게 느껴진다면 거기에 내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르르 몰려가 동조하는 내가, 20초 이내에 영상에 2시간을 태울 수도 있는 내가, 반려견의 눈보다 포털에 더 많은 시선을 두는 내가, 진짜라니. 소설 내에서는 계속해서 장면이 전환되고 시선이 바뀐다. 마치 우리가 매일 sns의 스크롤을 내리며 시시각각 다른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재미난 릴스를 보고 하트를 눌렀다가 다음 탭에 나오는 끔찍한 장면에 아까 웃은 데에 죄책감을 느끼는 우리. 그러다 그 죄의식도 무뎌진다. 내 생각과 감정을 묶어두는 다른 숏츠들이 쏟아지니까. 우리가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정보를 욱여넣다보면 감정에 무뎌지고 세상과 분절되는 자신을 느낀다.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이해하고 있는가? Sns로 연결감을 느낀다는 건 진짜 연결인가? 단절과 연결. 그 사이의 기이한 줄타기에 대해서 작가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어투로 ‘보여준다.’

 

  정보화 나아가 메타버스, ai 우리는 정말 '나아지고' 있는 게 맞는가? 생각은 자신의 몫이다. '생각'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동조와 단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진데 대기업의 마케팅에 매료된 사람들의 미래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부정적인 결과를 해마다 치솟는 자살률로 보여준다.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몰입을 잡아두고 묶어두는 게 필요하고, 세계 제일의 기업들은 앞으로도 이 방법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20대 중반인 나는 가끔 눈으로만 시집을 읽다가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생의 감각’이란 게 깨어난다. 시집을 내 목소리로 읽다 보면, 온전히 움직이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밈, 드립, 유행어로만 또래들과 말을 하고 어디선가 봤던 문장을 내가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생각은 나의 것인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도, 또다시 그때의 쾌락에 몰두하느라 잊어버린다. 기쁘니까. 밈으로 남을 웃겨주고 나도 웃는 게 순전히 재밌으니까.

 

  우리의 표현은 정말로 전보다 풍부해졌는가? 질과 양, 혹은 둘 다를 포함하여 따졌을 때 우리가 "나의 기분"을 설명하려 할 때, 우리 할머니 세대와는 어떻게 다른가? 포털의 세상과 접촉의 세상. 둘 다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과업이 아닐 수 없다. 무정형과 유정형의 삶. 우리는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서 더 재미를 느낀다.

 

  작가의 글에, 심상치 않은 문단 바꿈에, 자칫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우리가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느끼는 지점 아닐까. 가상의 인물, 내가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 진짜보다 가짜가 각광 받는 어쩌면 유행하는 그게 '돈이 되는'. 이건 끝나지 않을 일이 될 것이다. 이는 기회와 문제로 사랑과 결함처럼 지지부진하게 현대인들을 좇아다니며 자신을 봐 달라고 외칠 것이다. “개도 쌍둥이가 있을까?” 내가 한 질문이, 밈이 되는. 내 생각이 정형화되는. 아니 밈이 내 생각이 되는. 이 기묘한 시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적은 감상문입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