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문득 깨달은 건 이 책의 제목이다.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숲’은 내면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무의식의 세계’라고 저자는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동화 여주 잔혹사>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수많은 전래동화. 그 속에서도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플롯과 상징을 분석한다. 그러니 여기서 ‘숲’은 여성의 무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무의식의 세계가 넓고 아름다운 건 여성은 꼭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자아 성찰을 이루고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특히 ‘뱀’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마음을 끌었다.
여성의 속성이던 용과 뱀을 가부장제가 죽이다. ~놀라운 점은 아테나가 초기에는 뱀과 함께 그려지거나 새겨졌다는 사실이다. ··· 그중에서도 뱀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여신들은 아테나, 아르테미스, 그리고 키벨레다. ··· 원래 뱀은 대지에 붙어서 대지의 지혜를 가장 많이 가리키는 존재로 숭앙되었다. 메두사와 용은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힘이다. 이는 여성에게 내재한 커다란 힘을 말한다. 92P
신화에서 용과 메두사는, 영웅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싸워 물리쳐야 할 적’이다.
대지의 지혜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존재. 신비하고도 강한 힘을 가진 존재. 목적성을 가지고 활약할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적으로 인지되어 수많은 남성 영웅의 칼에 찔려 사라졌다. ‘영웅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조지프 켐벨의 책은 나도 읽어보았다. 헌데, 여성의 역할에 대해 그가 말한 인터뷰는 충격적이었다. “여자들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구세대였던 캠벨이 보기에 여성들은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고정좌표이자 귀환점이었다. 남자들은 상징계에서 여성의 위치가 바뀌기를 바라지 않는다. 62P
전래동화에서 남자 영웅들은 공주를 구하며 성장한다. 공주를 구하고 돌아와 왕의 자리를 부여받거나 금은보화를 얻거나 공주와 결혼한다. 혹은 모험을 끝나고 나서 아내를 끌어안으며 가정이 최고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웅은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공주나 아내는 영웅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여성은 거울 역할을 하느라 남자가 주인인 언어 밖으로 밀려났고, 이해의 밖, 몰이해 속으로 추방되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어졌지만, 저자는 이 책은 전래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비틀어본다. 전형성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터널의 입구를 지난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 돌아온다. ‘현실이 바뀌지 않아도 내면이 바뀌면 영웅이 된다.’ 또, <아름다운 바실리사>에서 바실리사는 아무 데도 가지 않지만, 세상을 변화시켰음을 저자는 피력한다.
저자는 숲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내면 속, 무의식의 세계로 걸어간다고 치환시켰기에 물리적으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일 테지만, 나는 이 행동을 물리적으로 바라보았기에 사실 바실리사가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살짝 동의가 어렵다. 강력한 내적인 동기는 없었을 테지만,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는 불꽃을 얻기 위해 (목적) 바바야가의 집에 도착 (목적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실리사는 떠났기 때문에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는 빌런의 과업을 모두 해결(통과)하고 불꽃을 얻었다. 여기서 바실리사는 영웅의 여정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론 “내면의 숲으로 떠났다가 자신에게 돌아온 여정”이라는 데에 동의하는데, 그가 내면의 성장 및 변화를 겪어 자신의 세계를 바꿨다는 사실은 유일무이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래동화의 주제를 읽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더해가야 한다. 우리들 무의식에 뿌리 깊게 심어져 온 잔혹사를 비극으로만 두지 않고.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글담으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