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가. 이 책은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그 단단한 믿음에 균열을 내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권 변호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한 열 가지의 치열한 기록들은, 단순한 사건 보고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느끼게 될 불편함과 분노는 역설적으로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증명한다. 이 책은 법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끈질기게 던진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가해자 중심적 문화’의 실체를 고발하는 디지털 성폭력 사건은 그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디지털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대목에서 그 문제의식은 극에 달한다. 저자들은 “디지털 성폭력은 촬영기기와 정보통신매체를 이용한 온라인 공간의 비대면성, 익명성이 보장된 환경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가해자가 느끼는 죄책감도 사회가 평가하는 가벌성도 상대적으로 덜한 듯 여겨집니다.”(69쪽) 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은 사법 시스템의 판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범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해자의 개인적 서사, 즉 그의 아픈 가족사나 경제적 어려움은 너무나 쉽게 법정의 동정과 감형의 사유가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과 삶은 단지 몇 장의 사건 기록으로 납작하게 축소되고,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가해자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변호할 기회를 얻지만, 피해자는 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종잇장만으로 자신의 존엄과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이는 결코 동등하거나 공평한 싸움이 아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법 집행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미성년 피해자에게 한 수사관은 "스폰서를 소개받기 위해 사진을 먼저 보낸 게 맞냐"(71쪽)고 질문했다. 이는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르면 미성년자의 의사, 즉 동의 여부는 성착취물 제작죄 성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71쪽) 는다는 명백한 법규를 인지하지 못한 직업의식의 부재이거나, 혹은 “성폭력 피해자는 순진무구 또는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환상 혹은 편견”(83쪽)이 무의식중에 발현된 2차 가해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이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사회 시스템이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하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장면이다. “피해자가 소리 없이 상대하고 있는 가해자들은 고소장에 적힌 가해자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겠습니다.”(71쪽) 라는 저자의 탄식은 그래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또 다른 거대한 폭력이다.
책은 또한 디지털 성폭력의 본질이 가진 교묘함을 파헤친다. “누군가는 불법 촬영물을 만들고, 누군가는 이를 공유하며, 누군가는 봅니다. 각 행위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태도가 배어 있습니다.”(81쪽) 라는 지적처럼 이 범죄는 단일 행위가 아닌 ‘개별적 행동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방관도 가해라는 것을 배우는 우리 사회에서, 유독 디지털 성범죄의 유포와 소비는 ‘큰일이 아니’라는 안일한 태도 속에 용인된다. 이는 결국 피해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놀잇감이나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는 끔찍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성폭력이 기존의 성폭력과 달리 지니는 큰 특징은 피해의 무차별적 확산성, 반복성 그리고 지속성입니다.”(69쪽) 라는 저자의 분석은 이 범죄가 피해자의 영혼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기는 행위임을 명확히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법의 경계 밖에 놓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즉 미등록 이주 아동의 현실을 다룰 때 더욱 확장된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1991년에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만 18세 미만의 모든 아동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본 협약은 국내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102쪽)라고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행법에 따라 이주 아동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출생 등록조차 되지 않아”(112쪽) 강제 출국 조치 등이 취해진다. 그 결과 이 아이들은 보건, 의료, 교육 등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혹자는 이 문제에 대해 부모의 불법체류 문제를 먼저 거론하며 아이를 이용한 편법을 우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시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어른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선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부모의 법적 신분이 아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아동 권리의 가장 기초가 되는 법인 아동복지법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른 시책의 수립과 시행, 아동 이익의 최우선적 고려를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 국적의 아동만을 적용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110쪽)라는 현실은 우리가 ‘보편적 인권’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선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보호와 돌봄에는 국경이나 장벽이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 답을 내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국 하나의 목소리로 귀결된다. “사건이 가해자와 피해자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사건의 결론이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과정마저 엉망진창으로 남지 않게끔 완충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80쪽) 이 문장은 차가운 법 조항 너머에 있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변호사들의 사명이자,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일깨운다. 그들은 말한다. “피해자 변호사로서 당장 함께 쓸 수 있는 우산을 찾아 펼쳐봅니다.”(65쪽) 이 책은 바로 그 우산을 함께 펼쳐 들자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 책은 고발장인 동시에 연대의 초대장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우리’의 범주를 넓혀가며 인권, 즉 ‘사람’의 권리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진정한 포용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혐오와 증오, 차별과 침해가 만연한 혐오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112쪽)라는 기로에 서 있다. 그 갈림길 위에서 이 책은 당신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들 가장 불편하고도 가장 절실한 목소리가 될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세상의 변화는 이러한 불편함과 마주하는 당신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