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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에서벗어날수없는사람
  • 스파클
  • 최현진
  • 13,500원 (10%750)
  • 2025-04-11
  • : 17,050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찬란하게.”



 책을 펼치기 전,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멈춰 섰다. 원하는 대로, 실패하지 않고, 찬란하게 사는 삶. 누구나 원하지만, 다짐조차 어렵고 실현은 더욱 아득한 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책은 어떤 서사를 갖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그 질문이 이 책에 마음을 열게 된 계기였다.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조건을 요구한다. 최소한 두 가지는 필요하다.
 하나,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

 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와 다짐.

 나는 그 두 가지를 온전히 품은 적이 있었을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렸을 적부터 나의 관심사는 단 한 번도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장래 희망을 적을 때, 인생 그래프를 그릴 때, 미래의 나를 상상할 때, 그 모든 방향은 유사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에게는 예술이라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모님이 예술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예술적 환경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을 때 이미지를 떠올렸고, 떨어질 대로 떨어졌을 때는 문장으로 나를 바닥까지 쏟아냈다. 그렇게 나에게 ‘표현’은 언어가 되었고, ‘표현의 방식’은 곧 삶의 감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언어를 ‘예술’이라 불렀고, 나는 자연스럽게 예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대안 학교에서 들었던 수업 중에, ‘나를 알기’라는 수업이 있었다. 하루는 미래의 자신을 생각하며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는 수업을 했었다. 모두 집중해서 작업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꿈이 없어서,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어릴 적에 반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넌 꿈이 있네. 부럽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부러워할까? 다들 자기가 원하는 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친구의 말은 삶의 방향을 명확히 알고 있지 않다는 불안과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걸.

 내가 느낀 그때의 사회는 아이들을 자원으로 만들 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자원이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찾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방향을 찾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문제’라는 이름의 키워드를 달았다. 아이들이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상관없었다. 사회가 만든 거대한 구조는, 아이들을 너무 쉽게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몰아갔다. 키워드는 빠르게 달렸고, 그 키워드는 새로운 문제를 계속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작 사회는 자신이 문제를 만든 주체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감췄다. 키워드는 형태가 없지만 무겁고 집요하게 작동했다. 삶의 방향키를 아직 스스로 쥐지 못한 아이들이 본인 스스로 혹은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존재의 방식은, 자신이 어디에 있던 상관없이 스스로를 옥죄는 기준이 되었다. 그 방식은 학교라는 공간과 어른이라는 존재를 통해 아이들의 삶에 깊게 스며들었고, 그 영향은 세대를 타고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 분명했다.

 키워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아이들은 두 종류였다. 부모가 곧 방향이 된 아이, 그리고 이미 스스로 방향을 정해 걷고 있는 아이. 나는 그 어디쯤에 있었던 걸까. 나는 여전히 그 틀 안에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해석되는 것을 불편해했고 궁극적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적 구조는 나를 끊임없이 위축시켰고, 스스로를 실패자라 느끼게 만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 배유리는 그런 시대적 구조와 마주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자신을 그 누구보다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인물이기도 하다. 배유리는 아빠의 죄책감이라는 돌덩이를 등에 지고, ‘최하위반’이라는 계급적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런 무거운 공간에서도 배유리는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눈송이라는 감각적인 언어와 미지수라는 수학적 감각, 적란운, 대기라는 과학적 사실 등을 통해 자기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되어 발화된다. 이 언어들은 배유리의 고립감과 자신감, 세상을 향한 미세한 반항의 감정을 보다 논리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말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배유리는 세상이 준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가 해석하고 정의 내리는 문장들 속에서 들려오는, 자기만의 언어를 따른다. 흐릿하고 미약했던 언어는 점점 선명해지며 결국 삶의 방향키가 되어준다. 배유리의 곁에는 끝까지 함께 걸어준 동행자 이시온이 있었고, 작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언자 이영준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이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을 생각하며 삶을 계속 살아낼 수 있었다.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나는 이 책의 28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꿈을 꾸면 지금도 심전도 소리가 울려.”


 책은 묻어두었던 감정을 들춰냈다. 죽었다고 생각한 나의 순간들. 깊게 고인 채 다시는 흘러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마음이, 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당연해 존재조차 잊었던 심장의 소리처럼, 기척을 숨기고 끝없이 뛰고 있었다. 책 속의 문장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끝이 헤진 편지처럼, 나를 한동안 멈춰 서게 했다. 그 순간, 내 안의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이 책은 말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성공의 루트, 그리고 사회가 키운 어른의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죄책감의 타자화’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을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따라가야 한다고. 이 책은 나에게 그런 물음을 던졌고,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그 시절의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시각이 절대적인 정답이라면, 실패자라는 말은 성립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절대적인 시각이 없기에 실패자라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는 단어야.” 삶은 정답이 아니라 문장이다. 내가 어떻게 쓰냐에 따라 이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진다. 이 책은 내가 나의 또 다른 언어를 알게 되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아직 부끄럽지만, 작은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이다. 찬란한 삶이 될 수 있게 방향을 조정하면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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