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은 독자들에게 부치는 편지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이 그렇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작가들에 대한 길디긴 편지를 받아든 기분. 편지를 받아보는 일은 이제는 흔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내게 보내진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듯.
아마 이 책의 저자도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시, 사랑, 삶’이라는,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각박하게 살아가다보니 언젠가부터 우리가 깊이 생각하기를 미뤄두었던 세 가지에 대한 긴 편지를...
이 책은 주옥같은 영미 작가들의 명시와 깊이 있는 사고와 언어로 그 시를 소개하는 작가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아름다운 시와 어구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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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다섯 단계 - 린다 파스탄
당신을 잃은 밤에
누군가 내게
슬픔의 다섯단계를 가리켜 보였다.
저 길로 가세요, 사람들이 그랬지
쉬운 일이지, 마치 사지가 절단된 후
계단을 오르는 것 같으니까.
(중략)
난 마침내 거기 도달했어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어.
슬픔은 도돌이 계단이야
나는 당신을 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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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해석은 탁월하다.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삶의 의지로 인해 나아지려 발버둥치는 과정이 계단을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 해석 바로 뒤에 ‘사지가 절단된 채 오르는 계단’이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찢어지고 말았다고 썼다. 그만한 슬픔을 경험해 보았기에 그렇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도돌이 계단이란 말.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눈물 흘릴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도돌이 계단같은 슬픔은 누구나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도돌이 계단같은 슬픔은 나 또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지만, 언젠가 슬픔이 다가오게 되면 이 책에 실려 있던 린다 파스탄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이 지점에서 글쓴이와 나의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감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긴긴 편지를 읽어가는 묘미일 것이다.
내 감정과 내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문학의 필요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를 누군가 묻는다면 숨겨진 나의 맨 얼굴과 나의 고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답하겠다.
시와 문학을 읽고 감동하던 시절을 잠시 잊고 살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P.S.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시는 루이즈 글룩의 <헌신이라는 신화>였다. 시 읽으면서 소름 돋아보기는 처음...
우선 아무 정보도 없이 시를 있는 그대로 느껴 본 후, 책의 저자와 함께 시가 내포한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