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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8,100원 (10%450)
  • 2004-05-15
  • : 78,828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중편 소설 분량의 짧은 소설인데, 다 읽고 나니 가슴 한 편이 싸해져 옵니다.


서평을 쓰는 지금도 그렇지만, 책을 읽을 때에도 개인적으로 아주 힘든 일들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 왔을 때여서, 뭔가 힘을 주는 긍정적이고 밝은 게 필요했는데, 반대로 어두운 것이 다가와서 그랬지 않나 싶습니다.

 

일본의 서정미를 극대화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장이자, 시간이 흐르자 아주 유명한 문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소설인「실격」의 실제적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은데, 이 문장도 점점 더 유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저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 거렸습니다. 그리고 몇 번을 다시 읽고 되뇌어 보았습니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았나,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모든 것이 가능할거라 믿었고, 자신감이 넘쳤던 젊었을 때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도 없었던 것 같고, 인생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 같았는데, 나이 들수록 부끄러운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인생은 모르는 것들이 자꾸만 늘어만 갑니다.

 

주인공 요조는 어려서부터 사람을 두려워하고 인간관계를 극도로 어려워해,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장난꾸러기로 포장합니다. 그래서 미술 학교진학을 원했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동경의 고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러다 화방에서 호리키라는 건달 미술학도를 만나 술, 담배, 창녀 등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비합법족인 일이라 흥미를 느껴 공산주의 독서회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동경의 집을 팔고 고향에 내려가자, 여관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동안 돈을 물 쓰듯 쓰다 생활에 쪼들리고 공산주의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런 자기 모습에 놀라 공산주의에서 도망쳐 무명 만화가가 됩니다. 그러다 애 딸린 여자의 정부가 되기도 하고, 돈 떨어지자 돌변하는 친구 호리키의 모습에 낙담하기도 합니다.

 

요조는 어디에도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오직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라 생각하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좌절해 폐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고작 스물일곱 살인 요조는 백발이 서성해 사람들이 마흔 이상으로 볼 정도로 겉늙어 보이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그런 외모가 이 세상에 이방인으로 살다간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간 요조가 인간 세계에서 깨달은 건 오직 이것 하나 뿐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길지도 않은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저런 고백을 할까요?

 

하지만 요조의 생각과 달리 그를 아는 사람들 기억 속에는 이런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제가 죽고 나면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이에 대해 스스로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한 1948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인데,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헤르만 헤세의「데미안」처럼 자신의 성장 체험을 다룬 성장 소설입니다. 그런데 성년이 된 이후의 얘기가 상당 부분 나온다는 게 이들과 차이입니다.

 

2차 세계 대전 패망 후 국가적으로 좌절감과 허무감이 도처에 팽배해 있을 때임을 감안하면 그의 작품이 충분히 공감이 가고, 이런 면 때문에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어 왔습니다.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책을 구입하기 위해 알아보니, 비(도서출판b)에서 전집이 나와 있네요. 작은 출판사로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제가 굳이 팔아주지 않아도 살 사람 많은 대형 출판사에서 사지 않고 그곳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큰 강에 돌멩이 하나 던지는 일 밖에는 안 되겠지만, 출판 생태계의 다양성을 위해서...

 

 

<책속 구절>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남자가 돈이 떨어지면 자연히 의기소침해지고 못쓰게 되고 웃는 소리에도 힘이 없어지고 괜히 비뚤어지거나 해서 말이야.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저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처녀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바보 같은 시인들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저에게 세상은 역시 바닥 모를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결코 단칼 승부 따위로 하나부터 열까지 경정되는 손쉬운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잊을 만하면 괴조가 날아와서 기억의 상처를 부리로 쪼아 터뜨립니다.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죽고 싶다. 숫제 죽고 싶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무슨 짓을 해도, 무얼 해도 잘못될 뿐이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대개 광인들은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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