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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 유현준
- 17,550원 (10%↓
970) - 2023-05-30
: 20,653
아버지는 평생 ‘남의 집’을 지었다. 5년제 건축공학과를 전공했고, 한때는 꿈도 많았을 아버지가 마냥 희망만을 좇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은 ‘건축’이라는 큰 틀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프리랜서로 설계 일을 하며 우리 남매는 집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건축 설계 도면에 익숙했고, 집안엔 늘 공학용 계산기가 두세 개쯤 있었다. 그뿐일까. 아버지는 현장에서 철근이 단단히 메꾸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철제 구조물 위에 올라가 인부들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다. 그러니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현장과 사무실의 사이에서 때로는 설계자로, 때로는 목수에 가까운 직책으로 일했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현장 노동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극찬할 만한 예쁜 건물을 생각해낼 여력도 없다. 단 한번도, 아버지는 당신이 건축가라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건축가의 사전적 정의가 어떻든지간에, 학위가 필요한 건축 일을 한다면 그건 곧 건축가나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아버지가 그간 설계도를 이리저리 만져가며 지어온 수많은 건축물들은 젊은 시절 건축업에 뛰어든 아버지의 커리어를 대변한다고, 말이다. 굳이 벽면과 기둥과 지붕을 예술적으로 꺾거나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내리는 책상에 고상하게 앉아 투시도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가. 아버지가 지은 수많은 아파트와 빌라, 사무실, 펜션들로 어렸던 나와 동생은 밥을 먹고 착실히 자라 성인이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
이미 여러 방송과 각종 유튜브 채널에 건축 전문가로 출연하며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현준 교수의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저서를 대학 졸업반 때 어느 인문학 교양 수업에서 접했다. (졸업반에 왜 교양 수업을 들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사실 지금도 인문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냥 지루하고 막연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인문학과 건축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궤를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건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더 확장하여 아예 건축이라는 개념과 세계의 유명 건축물 전체를 우리 삶에 빗대어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사람이 먹고 자고 생활하기 위한 건축은 선사시대의 움집으로 족하다. 그러한 일차원적-평면적 접근이 아닌, 벽 하나도 허투루 세우지 않았던 설계자의 의도와 그들의 멀리 뻗어나간 인생관까지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유현준 교수의 분석력과, 건축이라는 개념에 대한 다정함 어린 시선이 엿보였다. 가히 건축공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남다른 저자다웠고, 한편으론 저자의 높은 지성력이 부러워졌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선 빛이 난다. 과연 살아생전 가볼 일 있을까 싶은 가지각색 건물들과 시대를 빛낸 천재적인 건축가들의 향연 속에서 나는 어렴풋하게 내 아버지를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엔 과연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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