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2027년 헤르만 헤세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안부를 전하며>는 헤르만 헤세와 빈센트 반 고흐, 문학가와 예술가를 평행선에 두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방식의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와 빈센트 반 고흐는 부분적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기에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내가 두 거장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신학자인 아버지, 외면하는 이웃, 정신질환, 자살 시도, 내면에 대한 탐구, 예술을 통한 자기 구원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하지만 그 둘의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안부를 묻는 방식.
409. 반 고흐가 ‘악수를 보내며’라고 쓸 때, 그 직전 문장은 거의 대부분 돈 이야기였습니다. ‘물감을 보내줘’, ‘한 푼도 없어’, ‘빨리 편지 써줘.’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갑자기 악수를 내밉니다. 이것은 인사가 아닙니다. 줄(rope)이었습니다. 끊어지면 떨어지는 생명줄. 테오가 답장을 멈추면 반 고흐는 그림도, 생활도, 존재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악수를 보내며’는 ‘나를 놓지 마’라는 신호이자 언젠가 이 빚을 꼭 갚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헤세의 4만 4천 통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독자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엽서에 수채화를 그려 보내고,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는 것. 다정함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헤세를 매국노라 부르고, 아내가 병들고, 아이들이 떠났을 때, 그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편지였습니다. 4만 4천 통의 답장은 4만 4천 번의 ‘생존 확인’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두 거장의 안부를 묻는 방식은 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만 같을 뿐, 안부를 묻는 대상은 너무도 달랐다. 헤세는 독자를 향해, 반 고흐는 테오를 향해 안부를 물었다. 헤세는 내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생존 확인’이었다면, 반 고흐는 ‘나를 놓지 마’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부가 주는 행위 역시 명확하게 다르다. 헤세에게 안부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으로, 반 고흐에게 안부는 갚을 수 없는 ‘빚’으로.
책에는 헤세의 글과 그림, 반 고흐의 글과 그림이 교차되면서 실려있다. 이건 정말 특별하고도 신선한 만남에 손님으로 초대된 기분이었다. 특히나 헤세가 막내아들 마르틴(브뤼디)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아들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애틋해서 그곳에 마음을 뉘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헤세가 동봉한 그림 역시 동글동글하면서도 귀여워서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헤세가 노환으로 세상을 뜬 지 6년 만에 아들 마르틴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을 보고 마음이 철렁였다. 헤세는 여러 사람들과 안부를 묻고 답하며 자신을 구원했는데, 헤세가 없는 마르틴은 구원받지 못했구나 싶어서 마음이 쓸쓸해졌다.
반 고흐의 작품은 볼 때마다 친근감이 있으면서도 웅장하다고 느낀다. 이렇듯 서로 다른 감각이 어울릴 수 있다니 경이롭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내가 반 고흐의 그림을 더 이상 아름답지만은 않게 보게 된 건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는 돈이 필요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고흐의 이기성은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310. 지금 그림이 팔리지 않는 건, 네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해. 하지만 네가 내가 아무 수익도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곤란해하지만 않는다면, 사실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나는 반 고흐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작품보다 그 뒤에 서있던 테오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여전히.
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으로는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를 읽었다. 가장 큰 축이라는 건 몰랐지만 이 세 권의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책에 실린 <헤르만 라우셔>에 그 세 권의 책이 아주 진득하게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읽지 못한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밤의 사색>도 장바구니에 꾹꾹 눌러 담았다. 또 만나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