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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퀸님의 서재

 판타지 모험 같은, 몽환적으로 그려지는 고전의 장면들에 빠져들게 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이다. 상실과 기억의 마주함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시공사에서 나온 <파묻힌 거인>을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신작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고 해서 마냥 무겁고 진지하기만 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판타지 소재와 신비로운 세계관, 여행 서사가 절묘하게 가미된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고대 잉글랜드의 안개 낀 평원,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토끼 굴 언덕 마을에 살면서 동족인 브리튼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 부부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보살피지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마을을 뒤덮은 망각의 안개가 이들 부부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의 기억을 앗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기억도, 오랜 원한과 상처에 대한 기억도 모두 가져가버렸다. 
 어느 날, 안개로 자욱한 기억 저편에서 비어트리스는 문득 자신들에게 다 큰 아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아들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길을 떠난 노부부는 하룻밤 묵어가기 위한 마을에서 용감한 젊은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도깨비들에게 납치된 소년 에드윈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도깨비에게 물린 상처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소년은 전사와 함께 마을을 떠나 노부부의 여정에 동참하고, 이들은 곧 낡은 갑옷을 입은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을 만난다. 
 액슬을 알아보는 듯한 가웨인 경은 그러나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숨긴 채 이들과 동행한다. 힘겹게 찾아간 수도원에서는 수상한 의식이 행해지는 가운데 이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흔들리는 바구니에 몸을 싣고 강물 위를 떠내려가다 도깨비에게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독을 품은 염소를 끌고 산을 오르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위험 가득한 여행길에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향한 사랑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동안 잊혔던 어두운 상처들을 만나게 되는데...
 기억에 관한 문제, 안개가 걷히고 암용 케리그가 죽고 사람들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될 감정들이 비단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의 일만은 아니다. 색슨족과 브리튼 족 사이의 과거가 선명하게 드러나면, 그들이 상대에게 가진 증오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냥 잊힌 채로 두어야 더 행복한 일도 분명 있으니,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목적지에 다다를지는 몰라도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만 되살아나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 염려는 이미 비어트리스가 자주 언급했던 말들로 증명된다.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고, 바로 옆에서 액슬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어야만 안심했던 비어트리스가, 마지막으로 액슬에게 한 말이 그들 사이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럼 잘 가요, 액슬." 선명해진 기억으로 개운해지지만, 되살아난 기억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질 것 같다. 거인이 깨어난 그 순간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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