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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Topio stin omihli, 1988)>에 대한 몇 가지 단상

 

1.

영화에서 읽어야 할 것은 주제가 아니라 관점이다. 영화에 있어야 할 것은 개념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며 이미지의 사유이다. 알랭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이 개념으로 사유할 때 영화는 이미지로 사유한다. 이를테면 기차에 들이닥친 경찰을 피해 허허벌판을 달려가던 남매가 땅을 개발하는(초토화시키는) 거대한 기계 앞에 서 있을 때의 무력감-거기서 읽을 수 있는 건 앙겔로풀로스의 관점이지 주장이 아니다. 주장과 메시지로 영화를 읽을 때 <안개 속의 풍경>은 펠리니의 <길(La Strada, 1954)>과 베리만의 <처녀의 샘(Jungfrukällan, 1960)> 중간에서 어느 지점을 택하는지 특정할 수 없는 영화다. 그러나 그 지점은 애초에 중요한 논제가 아니다. <안개 속의 풍경>은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간절하게 응시하고 표현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2.

남매는 아버지를 찾고, 그것은 희망의 은유인 듯 보이지만, 영화에서 희망이란 단어는 한 번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속성을 지닌 일종의 빈 괄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너무나 멀리 있지만 영원히 그리운 그 괄호에서 민주주의를 읽어내는 것 역시 뻔하긴 해도 결코 이상한 독법이 아니다. 아니 애당초 이것은 독법이 아니고 응용법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빈 괄호를 향해 나아가는 개인은 고독하고 세계는 그들을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극단은 공연을 구하지 못하고, 감옥의 담은 넘을 수가 없다. 그들이 아무리 소리쳐도 천사들의 제국 밖에서 누군가 들어줄지는 전혀 모른다. 찢어진 필름 조각을 붙잡고 안개너머 나무를 희구하는 손은 침몰한 채 헬리콥터에게 견인된다.

괄호를 지칭하는 말을 영화에서 굳이 하나 찾으면 빛이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고 그 후 빛이 있었다. 빛 안에서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인간은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을 쫓을 수 밖에 없다. 빛이 승리해서가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실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인간은 죽으면서 빛만 갖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빛이 무엇인지 영화는 모른다. 그것은 관객이 채울 몫이다.

 

3.

지아장커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뿌리뽑힌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어떤 영화는 선택만으로도 위대해진다. 그것은 피사체나 풍경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창작자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선택에 가깝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 이후 좋은 영화의 필수적 조건처럼 되어버린 영화적 기교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영화 철학을 개발한다는 것. 애초에 이것은 브레송과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이었다. 중요한 것은 목적일 텐데, 브레송은 거짓을 제거하고 존재의 표정을 포착하고자 했고, 타르코프스키는 몽타주의 단절을 제거하고 시간의 감각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브레송-타르코프스키-벨라 타르로 이어지는 그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앙겔로풀로스가 구태여 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인간의 조건을 이미지로 표현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오히려 영화로 투쟁가를 썼던 미클로슈 얀초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원초적 의미의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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