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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나는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남진우, <타오르는 책>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편의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이 관심이겠지만 비평가들은 타오르는 불꽃의 신비로움 그 자체만이 관심인 것입니다.” -정성일

 

“그런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나로서는 그런 실패에의 기대야말로 스크린 뒤에서 영사기가 돌아가는 순간 소름이 돋는 첫 번째 이유이다.”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1.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과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5)> 이래로, 영화가 오로지 움직임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초에 24개씩 수천, 수만 개의 조각들로 영화를 구성하는 프레임들은 대체로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배열된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그들은 원초적인 운동의 미학을 완성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움직임이 나타나면 안 된다. 고다르의 점프 컷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화들은 운동을 충실히 재현한다.

조금 더 큰 단위에서 그들은 편집의 미학을 따른다. 고전적인 데쿠파주를 구성하든 소련의 몽타주를 구성하든, 몇 가지 원칙은 있다. 예를 들어 180도 상상선을 넘기며 교차 편집을 해서는 안 되며, 동일한 피사체를 찍을 때에는 30도 이상의 간격을 주며 움직여야 한다. 편집을 통해 숏(shot)을 넘어 하나의 장면(scene)이 탄생한다.

가장 큰 단위에서 그들은 각본의 미학을 따른다. 각본은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story)가 아니다. <시민 케인(1941)>의 탁월한 선례 이후 다중 플롯(multi plot)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구사하는 전술이 되었고,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후 관계가 아니라 인과 관계다.

 

2.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맥락에 따라 정교하게 배치된 사진의 조직도로만 보는 것도 미덥지 않다. 활동사진은 애초부터 트릭이었지만, 인간의 인식 능력이 결코 감지할 수 없는 한 감각에 의존하여 존재론을 세울 수밖에 없다.

영화의 역사는 단지 움직임에서 이야기로, 편집으로의 전환이 아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간접적인 시간-이미지에서 직접적인 시간-이미지로의 전환이다.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에서 역사상 가장 우아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서로 다른 맥락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포용할 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순수지속(duration)으로서의 시간이다. 어긋남과 충돌, 끊임없는 침투 속에서 과거는 현재와 공존하고 공간화와 기호화의 시도는 무력화되며 오로지 직관에 의해 흐름만이 감지된다.

이 순간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게 되는 것은 활력이고 시간이며 ‘삶’이다. 이 즈음부터 들뢰즈의 형이상학적 분석은 시네필들에게 계시적 가치를 갖기 시작한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남진우의 시에서, 그는 더 이상 불붙지 않는 책에 대해 괴로워한다. 책이 타버린 후 ‘머리에 불을 이고 세상으로 나가지’ 못해 슬퍼한다. 그는 잃어버린 불을 꿈꾸지만, 죽은 말로 가득찬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책이 타오르지 않는 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며 그가 진정 괴로워하는 부분도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시네필들의 영화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그들에게 영화는 관객에 상관없이 언제나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영화가 타오르지 못한다면 그 순간은 영화의 종말이며, 관객의 과제는 타오르는 영화를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영화에 불사르는 그들의 옆에는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영사기가 있다.

 

3.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4)>에 대한 몇 가지 평들 인용. “디지털 시대에 기적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이용철)”, “셀룰로이드의 정령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영화가 망각되지 않는 곳으로.(김소미)”, “아직도 영화의 기적을 믿는 자들에게 보내는 가장 아름다운 인사.(이동진)”

그들이 과거에, 아날로그에, 셀룰로이드에 기대어 기적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그 자체로 간접적인 시간-이미지다. 약간의 변동도 없이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그 소리를 멈추거나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흡사 라 시오타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과도 같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중반부에는 주인공 미겔이 창고에서 <열차의 도착(1895)>의 필름을 찾아내고 넘겨보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미겔이 느낀 것은 12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영화의 불꽃일 것이다.

필름, 그것은 130년 영화사의 모든 관객들을 한 자리에 집합시킨다. 전설로 남은 90년대 시네필의 바이블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한울아카데미, 1991)』의 서두에서, 구회영(김홍준)은 필름(film)은 기록 매체로서 영화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며 활동사진으로서의 무비(movie), 그리고 영화 예술로서의 시네마(cinema)로 영화는 발전한다고 언급한다. 5, 6년 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스코세이지의 발언이 격론을 일으켰을 때 모든 시네필들이 필사적으로 수호하려고 했던 개념 역시 그 ‘시네마’였다(이미 시네필의 명칭 앞에 시네마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진정 기대야 할 곳은 시네마가 아니라 필름인지 모르겠다. 영화가 예술이건 아니건, 움직이건 안 움직이건, 필름은 영화사의 모든 순간에서 묵묵히 돌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4.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영화의 불꽃을, 영화의 기적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웅변하지 않는다.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단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것은 특수한 사례일 뿐이지만, 에리세의 목표는 불꽃의 혁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꺼져가는 불꽃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려고 할 뿐.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영화의 불꽃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디지털과 스트리밍이 익숙해진 세상에서, 지속 같은 것은 옛말일지 모른다. 베르그송이 그토록 비판했던 시간의 공간화는 이제 모든 사람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영화는 쉽게 멈출 수 있고, 끊었다가 다시 볼 수도 있으며, 한 장면을 여러 번 돌려볼 수도 있다. 만약 필름을 구해다가 영사기로 틀어서 볼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영화를 디지털로 봐온 우리가 과연 그것을 살아낼 수 있을까?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미겔이 30년 전 영화작업을 중단시키고 실종되어버린 배우 훌리오의 흔적을 되짚어나가는 이야기다. 훌리오의 사연이 방송으로 나가고 얼마 안 가 요양원에서 찾게 된 훌리오는 이미 30년 전부터 기억을 잃은 상태다. 미겔은 훌리오의 곁에서 지내며 다양한 추억들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지만, 훌리오는 딸 아나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미겔은 훌리오를 위해 마을 극장에서 30년 전 중단되어버린 영화 필름을 상영한다.

영화에서 에리세는 하나의 모티프를 이야기의 모든 겹에 걸쳐 놓는다. 훌리오는 실종되었고 기억을 잃어버렸으며, 미겔은 영화감독을 그만두고 시골에 유폐되어 살고 있다.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 미겔과 훌리오, 롤라의 복잡한 관계도 미결이다. 영화의 내용은 중국으로 사라져버린 딸을 찾는 이야기이며 결정적으로 필름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가 창고에 처박혀 있다.

미겔이 훌리오를 만나기 전 훌리오의 방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미겔을 비추던 카메라는 천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텅 빈 침대를 보여준다. 사실 방이 비어있음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고 패닝하기 전에도 침대는 분명히 내화면에 있다. 에리세가 굳이 침대의 전경을 비추며 보여주려는 것은 사라져버린 시간의 자리다. 또한 자신의 방 안으로 돌아온 미겔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한참 동안 응시한다. 그것은 다시 떨어지는 기억의 방울일까, 아니면 조금씩 계속해서 흘러간 시간의 입자일까.

미겔과의 상담에서 훌리오를 진단했던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단지 기억으로 구성된 메모리가 아니라고, 그의 기억뿐 아니라 영혼을 깨워야 한다고. 미겔은 훌리오가 그를 ‘벽돌담 바라보듯’ 쳐다본다고 느낀다. 훌리오는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이 전혀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훌리오는 사진과 체스말을 단서로 필사적으로 과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니 과제의 핵심은 기억의 복원이 아니다. 중단되어버린 삶의 재개, 혹은 잃어버린 자아의 회복이 핵심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둘 때 미겔과 훌리오, 영화 속의 노인이 같은 목표로 움직인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삶의 어느 순간 특이점 앞에서 송두리째 시간을 ‘실종’당했다. 흡사 <현기증(1958)>의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헤어질 결심(2022)>의 박해일처럼. 수십년이 지나 그들은 기어코 시간의 문고리를 잡아당겨 봉인된 삶을 해제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완성되지 못한 영화가 펼쳐진다.

그러나 빅토르 에리세는 그들이 목표를 성취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이 점이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정말로 놀라운 부분이다). 영화의 기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기억을 재생시키거나 일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영화는 그런 걸 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빅토르 에리세는 단지 하나의 장면을 얻어내려 할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사람이 영화를 제대로 ‘살아내는’ 장면. 영화의 불꽃이 형체를 드러내는 장면. 그 장면을 얻기 위해 2시간 49분에 달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영화는 인식의 매체다. 그것은 문학처럼 사고의 매체도 아니고, 음악처럼 정서의 매체도 아니다. 아니 사고와 정서 역시 가능하지만, 모든 것은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평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가 21세기에 다시금 증명한 것은 영화가 인식론적인 주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는 것이다. 존재함에도 일상에 잠복되어 보여지지 않는 것들. 들려는 오지만 듣지는 않는 것들. 희미하게 열기만이 느껴지는 것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인식론에서 출발해 가치론에 접근하며 아렌트의 철학을 스크린에 재현했다.

영화를 살아내는 사람 역시 이 공식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를 살아내는 사람은 인식함으로써 살아내는 것이다. 영화를 살아내는 관객에게 그들의 눈은 카메라가 되고 그들의 귀는 마이크가 된다. 카메라가 셔터를 내리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 역시 눈을 감을(close your eyes)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며 보이는 것을 차단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영화를 살아내는 동작인 것이다.

사라져버린 삶의 공백을 필사적으로 찾는 자의 눈앞에서, 끝내 완성되지 못한 영화의 필름이 펼쳐지고 그 뒤에서 영사기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 순간 삶을 잃고 죽어 있던 인간은 영화를 살아낸다. 아니, 영화를 통해 삶을 산다. 그가 이후 삶을 되찾을 지는 모른다. 기억은 아마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영화 속에서 생의 격동하는 에너지를 느낀다. 물론 그의 표정만으로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 확실히 읽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가 완성되지 못하고 중단되는 대목에서, 스크린의 응시를 받으며 훌리오는 눈꺼풀을 내린다. 이 장면은 불꽃의 장면이며 기적의 장면이다.

영화의 제목은 영제로는 명령문이고 원제로는 동명사란다. ‘눈을 감는 것’, 이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눈을 감아라’. 이제 관객이 눈을 감을 차례다. 영화에 삽입되어 돌아가는 필름 소리를 들으며, 나는 10초간 눈을 감았다.

 

5.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장면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이동진의 평처럼 아직도 영화의 기적을 믿는 자라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분명 가장 아름다운 인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모던 시네마 이후 영화 비평가들은 유난히 영화의 감흥에 목을 매는 모양이다. 영화에 기적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을까. 아마도 고다르가 타르코프스키를 두고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체험”이라고 읇조린 다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사실 영화사의 최대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50년대의 거인들은, 오히려 영화 만들기에 대해 부끄러워했다(물론 버스터 키튼처럼 고전기부터 영화에 무한한 사랑을 바친 감독들도 있기는 하다).

‘히치콕의 고해성사’라는 로저 에버트의 평처럼, <현기증>은 히치콕이 스스로의 영화 세계에 얽힌 뒤틀린 욕망에 대해 고백하는 작품이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인 도널드 스포토의 해석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매들린에 매혹되어 주디를 매들린으로 만들려고 하는 장면은 영화 연출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은유이다(『히치콕의 영화 50년』의 ‘현기증’ 챕터 참조). 존재와 비존재, 참과 거짓을 넘나드는 아이러니는 히치콕이 계속해서 사용하는 모티프이지만, 그는 장르적인 활용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약간의 연민과 함께.

잉마르 베리만은 더하다. <현기증>이 히치콕의 고해성사라면 <페르소나(1966)>는 베리만의 고해성사다. ‘실내악적’이라고 규정되는 그의 스타일(이병창의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 참조)이 가진 인위성을 그는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페르소나>에서 베리만은 영화 자체가 가진 거짓성-환상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어쩌면 자신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 다른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현대의 감독들은 영화를 과할 정도로 사랑한다. 비평가들은 더더욱 과할 정도로 사랑한다. <파벨만스(2023)>가 개봉했을 때의 그 상찬을 보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중 <파벨만스> 만큼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 있는가. <쉰들러 리스트(1993)>의 경우 유럽권에서의 평이 호의적이지 않았고, <A.I.(2001)>나 <우주전쟁(2005)>은 분명히 호오가 갈린 작품들이다. 하지만 거장이 우주와 역사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내밀한 영화 세계를 비추고 긍정하는 영화 <파벨만스>에 대해, 평론가들은 일제히 찬사를 쏟아냈다.

에리세는 스필버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긴 했다. 프랑코 독재 정권 시기에 영화적 이력을 시작한 그에게 영화는 친구 이상의 것, 어쩌면 연인에 가까운 것이다. 데뷔작 <벌집의 정령(1973)>에서 어린 시절의 아나 톨런트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마을 극장에 상영된 영화와 현실을 혼동한다. 아나 톨런트의 그 순수하고 간절한 눈빛이 빅토르 에리세의 눈빛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성일이 벤야민을 인용했으니 나도 인용하면, “비평가에게 예술의 감흥은 아무것도 아니며 예술은 치열한 정신 활동에서 번뜩이는 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상하게도 영화 비평가들은 영화에 열렬히 사랑고백을 바침으로서 자신들을 문학비평이나 일반적인 예술비평과 선을 그었다.

나는 차라리 <퍼니 게임(1997)> 쪽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영화 예술에 대한 어떤 애정도 없어 보인다. 영화는 미디어의 일종일 뿐이며 관객을 폭력에 공모시키는 매체라는 영화의 과격하고 냉철한 주장 앞에서 자크 리베트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하네케가 영화 예술을 통째로 폄하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계속 영화를 찍고 있으니까. 어찌 되었든 나는 <퍼니 게임>의 그 통렬한 비판 정신이 통쾌하다. 한국의 시네필들이 가끔씩 자신이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는 건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결국 나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완전히 껴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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