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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님의 서재


1.

메틀 역사상 최고의 곡으로 꼽히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1990)’. 많은 사람들에게 ‘Painkiller’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롭 헬포드의 악마적인 샤우팅일 것이다. 그러나 ‘Painkiller’가 진정 메탈 역사상 최고의 곡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곡의 중반부, 마치 선언하는 듯한 롭 헬포드의 샤우팅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한층 피치를 올린 기타 솔로가 불쑥 틈입해 들어온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리듬 위에서 초고음이 ‘기타를 통해’ 뿜어져 나올 때, 비로소 이 곡은 완성된다.

2.

스래쉬 메틀의 최강자 슬레이어의 3집 <Reign in Blood(1986)>는 28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번의 완급 조절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기만’ 한다. 바로 전년에 나온 2집 <Hell Awaits(1985)>가 갖고 있는 악곡의 정교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슬레이어의 최고작은 <Reign in Blood>라고 말한다. 사운드의 질감과 볼륨이 압도적으로 발전했음이 분명 그 첫 번째 원인이겠지만, 어쩌면 무식하게 달리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점수를 얻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는 단지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가벼운 추측이 아니다. 이 추측에는 슬레이어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익스트림 메틀의 ‘질주’가 주다스 프리스트부터 메탈리카에 이르는 기존 메틀의 ‘질주’와 어떤 차이를 갖느냐는 질문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과연 ‘헤비 메틀’과 ‘익스트림 메틀’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헤비 메틀’과 기존 ‘하드 록’의 차이보다 큰가?

스피드와 템포의 차이는 음악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들 중 하나이다. 음악은 결국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이고, 속도는 시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변수니까. 분명 정의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 메틀은 ‘질주(疾走)하는’ 음악이다(내가 둠 메탈 같은 장르에 별 관심이 없고, 소위 시조로 불리는 블랙 사바스의 육중한 다운 튜닝 디스토션에 딱히 끌리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AC/DC의 강력한 8비트 로큰롤도, 레드 제플린의 야수 같은 헤비 블루스도 메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은 질주하지 않는다.

메틀의 질주는 1970년 딥 퍼플의 <In Rock> 앨범에 의해 시작되었고 2년후 ‘Highway Star(1972)’에서 리치 블랙모어가 가공할 기타 솔로를 선보이며 확립되었다. 질주가 대중음악사에 갖는 의미는 명확하다. 질주는 형식(song form)을 초월한다. 이 말은 메틀이 펑크 록처럼 형식 없는 무정부주의적 음악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메틀은 가장 엄격하게 형식을 지키는 장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음악이 형식을 텍스트와 단단히 밀착시켜 의미의 생성에 복무하도록 하는 반면 메틀에서 형식은 최소한의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나사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메틀을 듣는 리스너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음악적 기호들의 순수한 유희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틀의 본질은 메탈리카와 주다스 프리스트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가장 위대한 곡이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다. ‘Painkiller’에는 질주하는 메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3.

그러나 슬레이어에 와서는 그들의 음악을 질주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말 그대로 스피드만 본다면 <Reign in Blood>는 정말이지 극악무도한 질주다. 또 그들 역시 형식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는 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질주는 메탈리카나 그 이전 NWOBHM 세대의 질주와 전혀 다르다. 그들의 음악은 활동적이라기보다는 가학/피학적이다.

슬레이어를 메탈리카와 단절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시제의 소멸이다. 질주의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를 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은 필수적이다. 아트 록이 시간을 과거-현재-미래의 복합체로 간주하고 리스너에게 구조를 떠오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메틀은 과거와 미래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가운데 ‘현재’를 어떻게 강조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Reign of Blood>는 이러한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 앨범은 결코 쪼개지지 않는 단단한 원자처럼 느껴진다. 이 앨범에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도 과거-현재-미래도 아닌 영원히 회귀하는 지옥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슬레이어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질주의 감각이 아닌 구타의 감각이다. <Reign in Blood>를 듣는 다는 것은 지독히 가학적이면서 지독히 피학적인, 극악무도한 자기고문 같은 행위다.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말하면, 나는 슬레이어와 익스트림 메틀을 비판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새 가능성이다. 익스트림 메틀의 자기 고문은 세계를 뒤집고 시스템을 망가뜨릴 거대한 에너지를 잠재하고 있다.

언젠가 어느 평론가는 록을 ‘폭력적인 세계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음악 미학’이라고 정의한 적 있다. 물론 이 발언은 록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단한 허구에 불과하다. 이른바 록 정신(Rock Spirit)을 다시 거론하는 것도 낡아빠진 수사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록이 어떻게 만들어져왔고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던 간에, 록을 듣는 사람은(적어도 나는) ‘폭력적인 세계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음악 미학’으로서의 록을 믿으며 록을 듣는다. 물론 여기서 ‘폭력적’이라는 말은 약자를 괴롭힌다는 뜻이 아니라 시스템과 관습을 전제부터 거부하며 교란한다는 뜻이다. 록의 폭력적인 저항은 수백 가지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그것은 메틀의 질주일 수도, 펑크 록의 무정부주의일 수도 있으며, 아트 록의 탐미주의일 수도 있고 슈게이징의 환상일 수도 있다.

슬레이어의 <Reign in Blood>는 또 다른 방식을 개척했다. 이 앨범은 계시적이다. 슬레이어는 리스너를 지독히 고문하여 극한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비로소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리스너가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다른 모습이고, 그 다음은 다른 세계에 관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영민한 시선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슬레이어의 <Reign in Blood>는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한 위대한 예술이다.

당신이 메탈리카의 음악을 듣고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은 현실을 버텨갈 무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슬레이어의 음악에 빠졌다면 그것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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