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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슼님의 서재
  • 진주
  • 장혜령
  • 13,500원 (10%750)
  • 2019-12-27
  • : 1,008


은은하게 빛나는 복숭아색 띠지에 적힌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고, 지금의 신화다." 라는 김혜순 시인의 추천사는 책을 읽기 전 내게는 약간의 장벽이었다.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책을 덮은 지금은 이만큼 이 책을 잘 표현한 문구는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에세이보다 소설로 이름 붙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에세이를 초과하는 것들이 들어있어서요." 라고 했다는 한강 작가의 말도. 그 모든 것을 넘고 아우르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은.


처음 책을 펼치기 전, 어렵지 않을까, 했던 것은 잘 쓰여진 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언제나 성급한) 나의 우려였다. 쉽게 읽힌다고 말하면 왠지 이 이야기 속의 지나간 시절들을 쉬이 생각한다 여겨질까봐 다른 말을 골라보지만, 아직은 내가 가지고 있는 단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중간중간 그 캄캄한 부조리에 잠시 숨을 고를 때는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읽어나가게 하는 운율이 있다. 노랫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 이 이야기는 에세이기도, 소설이기도, 르포문학이기도, 또는 사적인 (그리고 공적인) 현대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노래'이자 '시'였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시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를 평소에 그리 즐기지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마도 시를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지만) 어쩌면 이제 시를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의 시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의 제목인 '진주'는 어렸던 딸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특별면회하기 위해 간 곳이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서 간 곳이기도 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기도 한 곳. 그리고 내게 이 제목은 지방의 소도시명일 뿐만이 아니라 보석 진주인 것도 같다. 열한 살 무렵의 작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야 써내려 갈 수 있었던 글. 쓰고, 또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쓰고, 또 쓰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고 지나 결국 쓰여진 글. 진주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째서 이 내밀한 이야기가 이렇게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노랫말처럼 읽혀서일까.



「차는 멈추고 공책을 열어 그는 쓴다. 떠오르는 언어를 받아 적어야 하기에 마음이 다급하다. 지금이 사라지고 있고, 지금이 아니면 사라질 것이므로 휘갈겨진 글씨로 그는 쓴다.

(...)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p.77)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오늘날 이 세계에서 반딧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시야가 반딧불을 찾아낼 만큼 충분히 어둡지 못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망설임 없이 걸어가십시오.

더 깊고 어두운 곳을 향해.」

(p.91)



「그것은 너무 큰 비밀이라서 경찰이 이 수첩을 읽는다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울 것이고, 딸은 그렇기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딸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열해보고 보여줄 수 없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는다.

(...)

딸은 이제부터 수첩에는 어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적기로 마음먹는다. 말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적기로 마음먹는다. 말할 수 없는 것,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어디에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만을 쓸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는 결코 닿을 수 없으며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쓸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쓰고 말할 것이다.」

(p.94~97)



「(비밀은 당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비밀이 없는 자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함부로 갈취하려 하지 마시오.)」

(p.98)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니지 않았다.

성경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했다.

그러자 비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 신앙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유일한 것, 독자적인 것이 되었다.」

(p.242)




장혜령 작가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나에 대해 쓴다고 해서 나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당신을 향해 쓰이고, 당신에게 가닿음으로써 비로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제 그것을 알 것 같다." 라고 했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으로 이제야 글쓰기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과 글과 책들이 많이 있다. 특히 요즘은 더욱. 글쓰기의 힘을 믿고 기꺼이 권하는 이야기들. 음, 그렇구나.. 생각했어도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를 보니 이제 알 것 같다. 글을 쓰는 행위가 가진 힘을 실제로 보게 되어서.

그리고 이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너와 내가 읽어 더 많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책을 덮는 동시에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단정하게 포장을 하며 누구에게 이 책을 건낼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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