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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풍경














한국의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첫 번째 역사적인 대국을 벌이기 전날, 아롱이가 다니는 바둑 학원에는 방송국 기자와 카메라가 찾아왔다. 이세돌이 직접 가르치거나 운영하는 학원은 아니지만, 이세돌과 인연이 있는 원장님이 이세돌의 양해를 얻어 운영하고 있는 바둑학원의 이름이 '이세돌 바둑학원'이니까. 게다가 서울에 위치해 있으니, 아이들도 많다고 하니, 여차저차 방송국으로서는 안전하고 편안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카메라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은 밝고 활기찼다. 모두들 이세돌 9단이 이길 거라 말했고, 다 같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세돌, 화이팅!'을 외쳤던 것 같다. 충격적인 1국 패배 이후에도 이세돌 9단은 두 번을 더 졌고, 4국에서 한 번 이겼는데, 이건 알파고와 인류의 대결에서 영원히 기억될, 단 한 번의 유일한 승리였다.

올해 초, 팔란티어에서 시작해 인공지능, 그리고 AGI로 이어지는 읽기와 쓰기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텐가. 그런 생각들. 내 고민과 혼란은 AGI의 '의사 결정'에 대한 부분이었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알고리즘 분석과 검색 기능의 확장에 더해, 인공지능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기능할 수 있는가. 오래오래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인지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능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장강명의 이 책은 2025년 6월에 출간되었다. 빨리 읽었어야 했다. 알라딘의 황금손 언니가 전자책 보여주며 이거 읽고 있다고 했을 때, 바로 읽었어야 했다. 읽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무력한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텐데...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이야기는,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 즉 그 시점에 해당 분야의 일류라고 볼 수는 없는 사람들, 현장의 최전선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인문학 포럼 같은 데서 할 것 같다. 그 포럼에서는 이런저런 논의가 오가겠고 어쩌면 깊은 통찰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말들은 기본적으로 무력한 언어들이다. 그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들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져 있어서, 그런 인문학 포럼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80쪽)

그랬다. 맞았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인공지능에 대한 현재의 연구 개발 과정이 인간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은 나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질문이다. 프린터에 빨간 불 들어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는 사람, 맥북 스크린샷 단축키 뭔지 물어보는 사람, 윌리엄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루시 맞냐고 물어보는 사람. 이런 사람이나 고민할 문제인 것이다. 실전은 다르다. 프로는 다르고, 현실은 다르다.

바둑계에서는 '기풍'이나 '바둑의 미학적 아름다움', '예술과 철학'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자리가 없다. AI 포석을 빨리 외우는 사람, AI 와의 일치율이 가장 높은 사람이 치열한 승패의 세계에서 승자가 되었다. 저자인 장강명은 소설가니까 인공지능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 소설은 어떤 소설일까,를 고민한다.

이런 전망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의 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인간은 그걸 하면 된다. 2016년 이세돌-알파고 대국 이후 프로기사들이 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바둑, 인간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바둑은 무엇이었나? (25쪽)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지어낸 산문체의 문학 양식을 소설이라 부른다. 오토픽션이 아니더라도 소설 속에는 작가의 경험, 생각, 심정, 감정이 그대로 녹아져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의 인물은 먹고, 일하고, 마시고, 달린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고 질투한다. 소설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가끔, 그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잭 리처의 양치질에 우리가 그렇게나 집착하는 이유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바둑계 내부의 천재형과 노력형의 간극이 좁아졌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에 정통한 인공지능, 아니 유사 이래 축적된 인류의 모든 정보를 다운받은 인공지능은, 소설을 쓸 수 없을까. 인간답지 않은 소설 밖에 쓸 수 없을까.


​인공지능이 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순간. 소설이 소중하고, 잭 리처가 소중하고, 스트라우트가 소중한 지금 이 시간.

소설, 소설을 읽어야겠다. 소설을, 인간이 쓴 소설을 읽어야겠다.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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