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9쪽)
이전에 읽은 책이 사사키 아타루의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이어서 그랬던 걸까. 첫 문장이 귀에 딱 꽂혔다. 죽음에 관한, 인생을 다룬 지루하고, 자세한 설명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종교, 신화, 소설, 영화, 컴퓨터 같은 이야기들이 인생의 일회성이 주는 불쾌를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10쪽) 일회용의 인생, 일회성이 주는 불쾌. 만약 인생이 일회용이라면. 우리네 인생이 진짜 일회용이라면.
나는 좀 못된 사람이라 그런가, 인생이 정말 일회용이라면 인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 같다. 낭비하고 오용하고, 남용했을 거 같다. 내게 인생은 소중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어, 쏘아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화살 같은 것, 아껴 써야 할 그 무엇이다. (카를로 로벨리 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말이다) 다시 오지 못할 것이어서 소중한 인생. 되돌릴 수 없기에 귀중한 시간들. 하지만, 인생이 일회용이라면, 한 번 쓰고 말 것이라면, 그렇다면 왜 아끼겠는가. 왜 아껴 쓰려 하겠는가. 지금까지, 경제관념이 없어 무엇이든 잘 아끼지 못하는 베짱이의 한탄이었으며.
작가를 가족으로 두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적잖이 고단하겠다. 최대한 노력해 건조하게 서술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따라 읽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작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게 된다. 그러니깐 비난이나 비판이 아니라, 순수하게 '실망'. 다짐하듯 작가가 한 번 더 적어 두었듯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다. 내가 내 부모에게서 그러했듯, 내 아이들도 내게 실망했을 것이다. 아니, 내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엄마인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이 자명한 우주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실망의 순간에 느끼는 아쉬움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있으니. 작가의 표현대로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이 부분이 내가 말하고 싶은 그 부분이다. 대학원 시절, 작가는 다른 연구실의 조교인 동기를 찾아갔는데, 오페라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작가를 보고 동기가 "응, 잠깐만, 이 곡만 듣고......"라고 말한다. 재킷에 <라 보엠>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곡, 참 좋지 않니?" 작가는 동기가 오페라를 듣고 있었던 것뿐 아니라, 음악을 방해한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품위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교양 있는 사람'.
우선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았다. 유명한 오페라의 음반부터 듣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음반에 끼워진 부클릿은 소중한 자료였다. 꼼꼼하게 읽고 거듭하여 들었다. 미술도 알아야 할 것 같았지만 실물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으므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책들을 통독했다. 그리고 기회가 올 때마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 미술관들을 돌아다녔다. 책에서 본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어렵게만 여기고 도전하지 않던 '세계 명작'들도 읽기 시작했고 세계 영화사도 공부했다. 그러나 영화사 책에 언급된 영화, 예를 들어 <전함 포템킨>이나 <시민 케인> 같은 영화를 볼 방법은 없었으므로 그냥 줄거리만 읽고 상상해야 했다.(130쪽)
교양이라고 했을 때,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특정 시대 유럽 서구의 문화와 그 문화의 모방을 의미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하던 '단정하고 단아한 글자체'는 이전에는 훌륭한 교양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을 테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그 교양은 이제 워드 프로세서의 등장으로 덜 중요한 교양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른 양식의 교양이 필요해졌다. 교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기처럼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어야 하지만, 뒤늦게라도 혹은 성인이 되어서 '따라' 잡을 수도 있다. '현대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세계 문학 전집', 혹은 '00대가 추천하는 세계 걸작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나, 프랑스어 혹은 영어에 능숙하지 않더라도 한글로 된 글을 부지런히 읽고, 내용을 이해하고, 유추할 수 있다. 미술은 좀 더 따라가기 어렵겠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작가처럼 하면 된다. 관련서를 찾아 읽고,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유명한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며 감상과 감동을 학습할 수 있다.
따라잡기 제일 어려운 분야가 나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특정 시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그 수많은 곡들을, 협주곡이든 교향곡이든, 혹은 오페라든 그 음악들을 일단 한 번 '들어' 보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곡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점을 넘어 감상 포인트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용이 필요할 것인가. 교양의 정수를 '향유'할 만한 여유로운 시간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소설은 줄거리로,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20분짜리 유튜브 영상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음악은 인강이 아닌지라 1.5배속 안 되고... 음악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해에 국내 문학상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알쓸신잡>의 인기 있는 출연자이고,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잘 ’팔리는‘ 소설가이기에 이렇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교양의 준거로 여겼던 곳에서 책을 출간(134쪽) 한 작가가 되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그의 내면에서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가 이미 그 상태를 탈출했기에, 이탈에 성공했기에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닿지 않는 그 이상향에 대한 갈구는, 끝모를 갈증은 눈을 감는 그날까지 멈춰지지 않겠지만, 그런 과거를 고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에 솔직하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이탈이 부럽다. 어쩌면 그의 성공이. 이쯤에서 찾아오는 나만의 개똥철학.
벗어난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어요.
탈출한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어요.
큰애를 태우고 가는 길에 CD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눌렀다. 조성진의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 지난번에 조성진 쇼팽 실황 (집에서) 잃어버려서 안타까운 마음에 샀는데, 그 시디는 결국 집에서 찾았고. 이 시디를 구입한 특별한 이유는 라벨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라벨을 모르는데 어떻게 라벨을 좋아하겠는가), 표지가 너무 예뻐서. 조성진이 너무 환하게 예쁘게 나와서 샀다. 플레이를 누르니, 다시 1번 트랙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원. 이거 뭐. 뭐라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이 시디에는 페이퍼가 딱 한 개 있는데, 그건 내가 이 시디를 구입했다고 썼던 페이퍼다. 다른 구매자들의 100자 평을 보시라. 참 좋은 음반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세상에, 조성진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정말. 할 말이 1도 없었다. 뒤에 앉은 큰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 우리는 그렇게. 조성진을, 조성진의 라벨을 들었다.
탈출한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벗어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