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 책만 펴면 얼마나 졸리는지. 순식간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게 된다. 너무 졸려서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를 돌아다닌다. 매해 벽두마다 두근두근 심정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뭘 준비해야 하나. 딥시크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용되지 않고 나 자신을 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해서 숙련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을까. 돈을 받고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가 앞을 서성인다. 눈에 띄는 책을 뽑아 든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
유물론
완벽하지 않을 용기
나르시시즘의 고통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Diary of a Wimpy Kid 『The Meltdown』
재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책으로만 6권을 골랐다. 그래도 우치다 책이 내가 가려는 그 어딘가에 제일 근접해 보인다.

이 장면은 약간, 아니 많이 알라딘스럽다. 혹은 알라딘틱하다. 알라딘의 리뷰, 알라딘의 페이퍼가 대부분 이렇지 않은가 싶다. 흠~ 좋았어. 아, 진짜 좋았어~의 동력으로는 리뷰를, 페이퍼를 쓰게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머, 어떡해. 와, 진짜 이 책 짱인데! 의 감상이 있어야만 리뷰를 그리고 페이퍼를 쓸 수 있다. 여러분~~ 여러분을 부르는 외침. 내 말 들려요?! 의 물음이야말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곳에는 눈 밝은 독자이자 귀 밝은 독서가들이 계시기에 읽고 쓸 수 있다. 여러분!! 여기 진정한 걸작이 있어요!


이 페이지도 남겨 두고 싶어 사진을 찍고 여기 박제해 둔다. 읽은 책이 보이면 반갑고 즐겁다. 『파이 이야기』, 『노인과 바다』 안 읽은 거는 억울하지 않고, 『작은 것들의 신』, 『조이 럭 클럽』이 보이니 마냥 신난다. 두 번째 페이지는 읽은 책이 더 많은데 그중에 제일 반가운 건 『레 미제라블』, 『유혹하는 글쓰기』 그리고 『쥐』다.
아침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책을 조금 읽는다. 저녁에는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읽고, 다시 또 읽는다. 이력서를 양식에 맞춰 고쳐 쓰고, 자기소개서를 한 번 더 읽고, 문장을 한 번 더 고친다.
길게 쓰고, 더 길게, 혹은 아주 길게 쓰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 나를 소개하는 일은, 나를 증명하는 문장을 쓰는 일은 이렇게나 고되다. 예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난감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면접/면접들. 옷깃을 여며도 바람은 차고, 나는 또 나를 설명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여유롭게 집을 나섰고, 엄마와 만나 그간 밀린 토크를 나눴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반대여서 엄마가 타신 초록색 버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한없이 매서웠다. 패딩 모자를 덮어쓰니 한결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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