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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과 선묘각
무량수전 좌우로는 이 위대한 절집의 창건설화를 간직한 부석(浮石)과 선묘 아가씨의 사당인 선묘각(善)이 있다. 부석과 선묘에 대하여는 민영규 선생이 일찍이 연구발표한 것이 있고 그 내용은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1965) ‘의상‘편에 자세하다. 부석사를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寺)라고도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이란다. 거대한 자연 반석인 이 부석을 이중환(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1723년 가을 어느 날 답사의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P216
불전 뒤에 한 큰 바위가 가로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내려 덮여 있다. 언뜻 보아 위아래가 서로 이어 붙은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약간의 틈이 있다.
노끈을 넣어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 돌인 줄 알 수있다. 절은 이것으로써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치는 전혀 이해할 수가없다.- P216
우리나라 사람은 애국심, 애향심이 남달리 강하다. 그것은 아름다운면이지만 그로 인하여 외국과 이민족에게는 대단히 배타적이라는 큰 결함도 갖고 있다. 심하게 말하여 지독스런 폐쇄성을 갖고 있다고 비난받을 만도 하다.
선묘는 한국인인 의상을 위해 희생한 중국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분의상을 만들어 그 희생의 뜻이 역사 속에 살아남게 한 것은 800년 전 일본인이었다. 나는 그 점을 사과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P221
부석사 답사에서는 보호각 쪽 언덕 너머로 외롭게 서 있는 고려시대원융(圓融)국사의 비를 보는 것도 답사 끝의 작은 후식(食)이 된다. 지금 우리가 끝없는 예찬을 보내는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1980년의 보수공사 때 문화재위원들이 내린 아주 현명하고 위대한 판단 덕분이었다.
그 당시 보수공사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부석사의 구조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그렇게 시행되었다.
문자 그대로 고색창연한 절을 유지하게끔 한 것이다.- P224
또한 의상 이후 부석사에서는 큰스님이 나오지 않았다. 하대 신라의대표적인 큰스님인 봉암사의 지증대사, 태안사의 혜철스님, 성주사의무염화상 등은 모두가 부석사 출신으로 나중에 구산선문의 개창주가 된스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석사에서 공부하고 떠났지 머물지는 않았다. 결국 부석사는 일시의 수도는 될망정 상주처로는 적당치 않다는뜻인가?
하기야 이렇게 호방한 기상의 주거 공간 속에서는 깊고 그윽한 진리의 탐색이 거추장스럽고 쩨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집이란 언제나 거기에 알맞은 사용자가 있는 법이니 의상 같은 스케일이 아니고서는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큰스님들은 간간이 이곳을 거쳐가며 호방한 기상을 담아갔던 것은 아닐까. 이 점은 금강산의 사찰도 마찬가지다. 절집도 사람집과 마찬가지로 살기 편한 집과 놀러 간 사람이편한 집은 다른가보다.- P225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P226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P227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또 거기에 다녀온 다음에는 모두 내게 공감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지금 어젯밤 그 멋진 축구 경기를 못 보고 잠만 실컷 잔 사람들을상대로 상황을 다시 떠올려 해설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P230
감포로 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어디일까? 남원에서 섬진강을 따라 곡성·구례로 빠지는 길, 양수리에서 남한강 줄기를 타고 양평으로 뻗은 길, 풍기에서 죽령 너머 구단양을 거쳐 충주댐을 끼고 도는 길. 어느것이 첫째고 어느 것이 둘째인지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중에서 내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은 경주에서 감은사로 가는 길, 흔히 말하는감포가도다.- P230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 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건축 부재의 표현을 간소화하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나는 이탑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P245
위대한 탄생, 삼층석탑
정림사의 오층석탑은 곧 신라에서도 모방하는 바가 되었다.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장항리의 오층석탑 등이 바로그 맥이다. 그러던 오층석탑이 감은사에 이르러 삼층석탑으로 변신하게되었다. 그 형태와 층수를 변형시켜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양식적 분석에 입각한 조형 의지의 파악으로 설명해야 한다.- P247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1층의 몸체가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백제 식의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P247
기단을 상하 두 단으로 튼실하게 쌓고, 몸체는 1층을 시원스럽게 올려놓고는 2층, 3층을 점점 좁혀서 상륜부 끝으로 이르는 상승의 시각을 유도했다. 상륜부 끝에서 3층, 2층, 1층의 몸체 지붕돌과 기단부의 끝모서리를 그으면 80°의 경사를 이루는 일직선이 되니 여기서는 기단부가 튼실함에도 상승감이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 구조가 삼층석탑 형식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삼층석탑, 그것은 진짜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P247
감은사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나는 저 장중한 위세 앞에 주눅이 들어오금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저 위대한 힘, 그것이 곧 인호라는 학생의 "돌덩이가 내게 말하네요"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P248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大德, 덕이 높은  스님)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는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문란케 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 (하늘과사람 사이를)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앞으로는 다시 다니지 말아야 한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그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는 8세 때 왕이 세상을 떠나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 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아낼 수없었다. 표훈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왕은 여자로 태어나려다 남자가 되었으므로 날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도사(道士)들과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王)이 된 김양상(金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한다.- P260
우드 관장이 멀리 솔밭 아래 오붓하게 들어앉은 강원을 보면서 "나는세계의 무수한 나라를 방문했는데 자연이 예술과 건축에서 차지하는비중이 이렇게 큰 나라는 처음 보았다"고 신기한 느낌을 말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은 단지 예고편일 뿐입니다"(It‘s only a preview)라고 대답했다.- P280
불국사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결론 삼아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 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P281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인가? 동생 내외와 나의 아내와 함께 둘러앉아답사 계획을 짜는데 아우는 폐사지라는 걸 하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제수씨는 아무 데고 한가한 곳이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의 아내는 하나를 보아도 제대로 된 감동적인 유물을 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이 세가지 요구를 다 충족하는 답사 코스로, 내가 서울에서 출발하는 당일 답사의 영순위로 삼고 있는 서산 마애불(磨崖佛)과 보원사(普願寺)터를  제시했고 모두들 거기에 합의했다.- P284
나는 언젠가 가을 답사 때 동행했던 나의주례 어른이신 고 리영희 선생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흘렸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을날의 단풍이라고 하면 먼 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화려한 색감을 말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풍의 주조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이가들고서야."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광이 느끼기에 따라선기암절경보다도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충청도 땅, 옛 백제의 아름다움 속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있을 풍토적 성격일지도 모른다.- P286
평양에 가면 인자한 어머니의 품속에 드는 것 같고 경주에를 가면 친한 친구를 대한 것 같으며, 평양에서는 무엇인가 장쾌한 생각이 나고 경주에서는 저절로 화창한 기운이 듭니다. (...) 평양은 적막한 중에 번화가 드러나고 경주는 번화한 가운데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때를 놓친(실시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가 못다 한 천재자(天)같이, 대하면 딱하고 젊고 눈물조차피어오릅니다. (...)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땁기도 한 것이 부여입니다. 적막할 대로 적막하여 표리로 다 적막만 한 것이 부여입니다.
(...) 거기에서는 평양과 같은 큰 시가를 보지 못하고 경주와 같은 풍부한 유물들을 대할 수 없음이 부여를 더욱 쓸쓸히 느끼게 합니다마는 부여의 지형으로부터 백제의 전역사를 연결하는 갖가지 사실 전체가 한 덩어리의 쓸쓸함, 곧 적막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에 비추임을앙탈할 수 없습니다. 사탕은 달 것이요, 소금은 짤 것이요, 역사의 자취는 쓸쓸할 것이라고 값을 정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고적다운 고적은 아마도 우리 부여라 할 것입니다.- P317
부여 답사는 순서와 시간대를 적절히 배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부여 답사의 일정표를 하나의 모범 답안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출발하든 광주 혹은 대구에서 출발하든, 또 공주를 거쳐 오든 곧장 오든 오후 서너 시에는 부여 초입에 있는 능산리고분군에 들르는 것으로 부여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왕도에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며, 거기에서 나성의 등줄기를 어깨너머로바라보며 부여로 들어갈 때 곧 부여 입성(城), 백제행을 실감케 된다.- P319
능산리 다음 코스는 부소산성이다. 부소산 산책길을 거닐면서 영일루(迎一樓)에서  백화정(百花亭)까지 누정(樓亭)마다  오르면서 굽이치는  백마강 물줄기와 부여  읍내와 그 너머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호젓한 부소산성을 맘껏 즐기고 숙소로 돌아온다. 만약 여름날 해가 길어 시간이허락된다면 규암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오르며 낙화암 지나 고란사 선착장에 내려 부소산성을 거닌다면 그 즐거움은 더욱 클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구드래 나루터로 산책 나와 구교)제방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백마강 땅콩밭으로 내려가 달빛 어린 강물을 바라보기도 한다(지금은 땅콩밭에 코스모스가 장하게 피어난다). 이튿날 아침일찍 산보 삼아 여유롭게 걸어 궁남지와 정림사 오층석탑을 답사하고돌아와 식사를 한다. 부소산성은 저녁이 좋듯이 궁남지와 정림사탑은아침 안개에 덮여 있을 때가 아름답다. 아침 식사 뒤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진열된 백제의 유물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차분히 감상한다.
그리고 부여를 빠져나가기 전에 백마강변의 나성 한쪽에 세워져 있는불교전래사은비와 신동엽 시비를 보고 나서 임천의 대조사로 혹은 외산의 무량사로 향하는 것이다.- P320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P339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P340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 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 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 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P345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정도전은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왕궁 건축은물론 도로와 시장에 이르는 신도읍의 기본 설계를 완성하고 종묘, 궁궐,
도성 순으로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놀랍게도 불과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서울 건설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2월 3일 종묘의 터파기 고유제를 지내고 약 10개월 뒤인 1395년(태조 4년) 9월에 공사를 완료했다는 사실이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지체 없이 그해 10월, 4대조 이하 선조들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했다. 이것이 조선왕조 종묘의 시작이다. 종묘 터파기다음날인 12월 4일에 경복궁의 개토제(開土祭, 공사를 시작하기 전 토지신에게올리는 제사)를 열었고, 태조가 정식으로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종묘 완공3개월 뒤인 1395년 12월 28일이었다. 모든 것이 종묘가 경복궁보다 앞서 이루어졌다.- P357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P377
내가 어찌 경복궁을 헛것으로 만들고 쓰지 않겠는가? (...) 조정의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 성인이나 임금의 생일)의 조하(朝賀, 경축하고조문함)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경복궁에서 하기 위해서 때로 기와를 수리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11년(1411) 10월 4일자)- P384
태종의 뜻인즉 국가적 의전과 의례는 경복궁에서 치르고, 창덕궁은일상 정무를 보고 기거하는 곳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창덕궁은 경복궁이 있다는 전제하에 지은 것이 된다.
돌이켜보건대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태조 4년(1395) 이고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년(1405)이었다. 조선 개국 후 10년 사이에 전혀 다른성격으로 지어진 두 궁궐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비극의 소산이었지만결국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산이 되었다. 당시 이 엄청난 두 차례의 대역사(事)에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조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싶다.- P384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 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P40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P407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P407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室儉而不-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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