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대장정 서재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물론 더 나갔다면 아마도……. 무선전신에서 그렇게 알려 왔지만, 하지만 계기판 램프가 너무 희미해 제 손조차 보이지 않았는걸요. 날개라도 보려고 현등을 켜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더군요. 마치 빠져나오기도 힘든 커다란 구멍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엔진이 진동하기 시작했죠."- P-1
‘내 부하 중 가장 용감한 친구야, 그는. 그날 밤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비행을 잘했기 때문이야. 정말 훌륭했어. 하지만……. 나는 그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어야 해.’- P-1
‘사랑받으려면,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면 이를 숨기거나. 하지만 나 역시 인간으로서의 온정이나 우정 같은 것에 둘러싸여 살고 싶다. 의사는 간혹 온정이나 우정이 발휘될 수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는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내가 저들을 잘 훈련시켜야 어떤 상황에 처하든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저녁때, 여기 내 사무실에 항공지도를 펴놓고, 혼자 앉아서 비행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이 막연한 법칙이 느껴진다. 내가 긴장을 풀고, 또 잘 조율된 일들이 그저 흐름에 따라가도록 내버려두면, 신기하게도 꼭 사건이 터지고 만다. 항공기가 운항 중에 부서지거나 혹은 가고 있는 우편기가 폭풍으로 인해 지연되거나 하는 것이 오로지 내 의지 하나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가진 힘에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P-1
‘나는 그를 두려움에서 구해준 거다. 나는 그를 공격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통해, 미지의 세계 앞에서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 방해요소를 공격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그에게 동정심을 보여줬다면, 그리고 그가 겪은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줬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미지의 세계에서 돌아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고, 사람들은 오직 이 미지의 세계만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어두컴컴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 자신은 아무것도 마주친 게 없었다고 얘기해야 한다. 이 친구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야 하며, 손이나 날개만을 비추어줄 광부용 소형 램프 하나 없이도 딱 벌어진 어깨로 미지의 세계를 헤치고 나와야 한다.’- P-1
"코모도로 알림. 귀항 불가능함. 폭풍."
그는 안데스 산맥의 코르디예라 산계에서 바다 쪽으로 별안간 방향을 바꾸었던 이 범상치 않은 폭풍의 공세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태풍은 그가 닿기도 전에 마을 전체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것이다.- P-1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렇게 보고하게. ‘사방이 꽉 막혔음. 1,000km 앞에서 폭풍 전진, 가시( ╉ )거리 제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기 바람.’"- P-1
지도 상에는 연락이 두절된 지역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소도시들에는 이미 태풍이 불어 닥친 상태였고, 모든 문이 닫혔으며 거리마다 각각의 집들은 불빛 하나 없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박 신세였다. 이들을 해방시켜 줄 건 오로지 새벽뿐이었다.- P-1
2,000km 내의 모든 무선국에, 혹 비행기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무전이 잡히면, 30초 안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통보하라고 지시해둔 상태였다. 그러면 파비앵에게 대피할 만한 곳의 위치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P-1
별들은 여전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지만 이는 한순간의 오아시스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그 오아시스는 파비앵이 아무리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악의를 품은 바람이 건드려서 더럽히는 위협적인 밤이었다. 정복하기 힘든 밤이었다.- P-1
언젠가 교량 건설 현장 부근에서 엔지니어 하나가 리비에르에게 이런 말을 건넸었다.
"이 다리가 한 사람의 으깨진 얼굴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겁니까?"
이 길을 이용하는 농부들 중에는, 다음 다리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이처럼 끔찍하게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리를 건축하고 있다. 엔지니어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공익이라는 건 개개인의 이익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정당화해주지 못합니다."- P-1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 값을 따질 수가 없을 만큼 값어치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진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던가. 그게 뭐란 말인가?"- P-1
파비앵은 운명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충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아무 데나 착륙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야산과의 충돌만은 피하기 위해 그는 하나밖에 없는 조명탄을 쏘았다. 조명탄은 불꽃을 터뜨리고 뱅뱅 돈 뒤 어느 평원을 비추고는 꺼졌다. 그곳은 바다였다.- P-1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다 틀렸다. 40도나 오차를 잡아놓고 비행했는데도 편류하고 말았어. 이건 태풍이다. 육지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P-1
별이 보여주는 지표 덕분에 파비앵은 소용돌이를 보다 잘 견제하며 올라갈 수 있었다. 희미한 별빛은 그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빛을 찾으려고 너무도 오랫동안 고생을 한 터라 이제는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희미한 여관 불빛 하나로도 풍족했던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이 빛의 신호 주위를 죽을 때까지 뱅글뱅글 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빛의 영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구름 사이로 솟아오름과 동시에 비행기는 단번에 놀라울 정도의 평정 상태를 되찾았다. 기체(機體)를 출렁이게 하는 그 어떤 파동도 없었다. 둑을 지나는 거룻배처럼 그는 저수지로 들어갔다. 파비앵은 축복 받은 섬들의 만처럼 하늘 어딘가에 숨어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비행기 아래에서는 돌풍과 폭우,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두께 3,000m의 다른 세상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사나운 폭풍도 별들이 있는 쪽에서는 수정처럼 맑고 백설같이 빛나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폭풍권의 3,800m 상공에 갇힘. 바다 위쪽에서 표류하다가 내륙을 향해 정서(正西)로 비행 중. 아래쪽은 완전히 봉쇄되었음. 지금도 바다 위인지 확실치 않음. 폭풍권이 내륙까지 확장되었는지 통보 바람."
"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저는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에요. 우연히 눈에 띄는 아이의 옷가지며,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아이에 대한 애정 같은 거요. 아이에게 더 이상 물릴 수가 없어 쓸모가 없어진 제 젖처럼, 아이에 대한 애정 또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에요……."
‘우리는 영원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행동들이, 누군가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갑자기 그 의미를 잃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니까…….’
리비에르의 시선이 다시 전보를 향했다.
‘지금 우리에게서는 여기 이 전보를 통해 죽음이 스며드는 것이겠지. 이 전보들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삶이 굴러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리비에르는 생각했다.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일궈놓은 세계는 이제 한 대의 고장 난 범선처럼 느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위에서 고장이 난 범선 같았다.
로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부장님…… 그 부부는 결혼한 지 6주밖에 안 됐습니다."
"일이나 계속하게."
‘아마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행위는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가 있었던 덕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보 하나하나에 의미가 가득 담기고, 야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걱정거리를 던져주며 조종사에게 비장한 목표를 부여해줄 때, 리비에르 역시 죽음과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바람이 바다에서 선박 하나에 다시 힘을 실어주듯 그 자신이 일궈가는 이 세계에서 삶이 다시 소생하게 된다면, 리비에르는 다시 죽음과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리비에르는 오직 엄청난 재앙이 있고 난 후에만, 그렇게 운명의 덫이 이제 사람을 풀어놓아 주었을 때에나 느껴지는 이완의 느낌을 맛보았다. 그는 전 지역 경찰서에 신고를 해놓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집에서도 질서는 유지되어야 하는 법이다. 리비에느는 로비노에게 손짓을 했다.
"북부 지역 기항지들에 통보하게. ‘파타고니아 노선 우편기가 상당히 연착될 것으로 예상됨. 유럽행 우편물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타고니아 우편물을 다음 편 유럽행 우편기 편으로 보내겠음.’이라고 말이네."
"파타고니아 우편기는 도착했나?"
"기다리지 않기로 했네. 실종됐어. 날씨는 좋은가?"
"날씨는 매우 좋다네. 그럼 파비앵이 사라졌다는 건가?"
그들은 파비앵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깊은 동지애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조심하게! 밤이니까 말이야……."
그에게 동료의 충고가 들릴 리 없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구름과 산들, 강물과 바다를 향해 웃기 시작했다. 조용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퍼지는 희미한 웃음은 마치 산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짜릿함을 느꼈다.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구름과 산들, 강물과 바다보다도 훨씬 더 강한 웃음이었다.
"왜 그러나?"
"그 바보 같은 리비에르가 글쎄…… 내가 겁먹은 줄 알고 있더라니까!"
승리, 패배……. 이런 단어들은 죄다 부질없는 것이다. 삶은 이런 이미지들을 초월하여 이미 다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승리는 한 나라를 나약하게 만들지만 패배는 그 나라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리비에르가 맛본 패배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 한 번쯤 겪어야 하는 예정된 절차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오직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5분 후에 무선사는 기항지들에 경보를 발할 것이다. 그리고 15,000km에 걸쳐 힘차게 약동하는 삶의 맥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미 비행기라는 오르간 선율이 하늘 속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완강한 시선으로 직원들을 굽어보며 그 사이를 지나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리비에르는 위대했다. 그는 승리라는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승리자였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