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북유럽 바로크
― 전쟁과 돈, 시민, 그리고 물과 싸우며 만든 그림
로마 바로크를 읽을 때 미술 뒤에 교황과 종교, 권력과 도시가 보였다면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바로크를 한 단어로 줄이면 흔히 ‘화려함’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는 그 말이 잘 맞았다. 거대한 성당과 광장, 조각과 천장화가 사람을 압도했고, 건축과 회화와 조각은 종교와 권력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는 그 한 단어만으로 바로크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루벤스가 활동한 남부 네덜란드에는 가톨릭교회와 궁정을 중심으로 한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가 있었다. 그러나 북부 네덜란드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화려한 성당 대신 시민의 집과 창가가 보이고, 왕과 성인 대신 의사와 상인, 술집의 사람들, 학교의 아이들이 나타난다. 들판과 풍차, 부엌과 식탁까지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같은 바로크 시대였지만 북부 네덜란드의 미술은 로마보다 훨씬 소박하고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종교는 중요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보다 갈라놓았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충돌했고,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한 네덜란드는 긴 독립전쟁을 치렀다. 북부와 남부는 갈라졌고, 그 차이는 정치와 종교뿐 아니라 미술에도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힘이 커졌다.
돈이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된 시민들이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교회와 왕실만이 아니라 상인과 도시의 시민이 미술의 중요한 소비자가 되면서, 성인과 왕이 차지하던 그림 속에 의사와 상인, 술집 사람들, 부엌과 거리, 꽃과 음식, 들판과 풍차가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를 읽으면서 나는 미술양식의 변화뿐 아니라 누가 그림을 사고, 무엇을 그리고, 어디에 걸어두는가가 달라지는 과정을 함께 보게 되었다.
1. 네로가 죽기 전에 보고 싶어 했던 화가
루벤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술책이 아니었다.
어릴 적 『플랜더스의 개』였다.
네로는 가난했고, 할아버지를 잃고, 일자리마저 잃었다. 마지막에는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본다.
어렸을 때는 네로가 불쌍해서 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화가 나는 쪽이 조금 달라졌다.
『플랜더스의 개』는 루벤스가 살았던 17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 작가 위다가 1872년에 발표한 소설이니 네로의 비극은 루벤스보다 훨씬 뒤인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시대의 성당 안에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그린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바로 그 성당 밖에서 가난한 아이 하나가 굶고 추위에 떨다가 죽어간다.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말했지만 현실의 사회와 공동체는 그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네로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복지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도 충분하지 않았고, 주변 어른들도 아이 하나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네로가 불쌍했고, 지금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회가 답답하다.
그래서 루벤스를 다시 만나자 네로부터 떠올랐다.
2.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길로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는 한때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던 저지대 세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갈등이 깊어졌다.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개신교도들이 성당의 성상과 종교화를 파괴했다. 이어 스페인의 강경한 진압이 계속되었고, 1576년 안트베르펜에서는 책이 소개한 「스페인의 대학살」의 배경이 된 참극까지 벌어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성상을 때려 부수고, 다시 종교와 왕권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북부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고, 남부는 가톨릭 세력 아래 남았다.
루벤스가 활동한 안트베르펜은 남부에 있었다.
남부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웅장한 종교화가 다시 발전했고, 북부에서는 개신교와 도시 시민사회의 성장 속에서 다른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한때 하나의 정치적 공간에 있던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 때문에 갈라졌고, 그 차이가 미술의 모습에도 드러났다.
3. 루벤스, 화가이자 사업가이고 외교관
루벤스는 그림만 잘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제자와 조수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작업한 뒤 자신이 마무리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오늘날 식으로 보면 뛰어난 화가이면서 공방의 대표이고 사업가였다.
그런데 외교까지 했다.
스페인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협상에 참여했고, 영국의 찰스 1세에게 「마르스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를 선물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를 밀어내고 평화와 풍요를 지키는 장면을 외교의 메시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림으로 돈을 벌고,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그림을 외교에도 활용했다.
‘평화의 사도’라고 부르면 조금 거창할 수 있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실제로 평화를 위한 협상에 참여한 화가였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었다.
4. 루벤스의 현실적인 Inner Peace
루벤스의 말년은 더 흥미로웠다.
그는 이미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얻었으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넓은 땅과 성을 사고 두 번째 부인 헬레나 푸르망과 가족생활을 하며 전원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는 외교활동에서도 물러났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통풍으로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의 말년 풍경화를 경제적 여유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교와 정치의 세계에서 물러난 것, 새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 건강의 변화, 고향 플랑드르의 풍경에 대한 애착, 그리고 더 이상 주문자의 요구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돈의 역할을 빼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먹고살 걱정도 없고, 집 걱정도 없으며, 반드시 주문자의 취향에 맞는 그림만 그려야 할 이유도 줄어들었다.
돈이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생기는 수많은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쿵푸팬더』에서 시푸 사부가 말하는 Inner Peace가 수행을 통해 얻는 내면의 평화라면, 루벤스의 말년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Inner Peace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여유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과 사람, 자기가 그리고 싶은 풍경을 그렸다.
5. 독립전쟁이 만든 나라, 오렌지색이 된 역사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80년에 걸쳐 이어졌다.
빌럼 1세, 오라녀 공 빌럼은 스페인의 종교정책에 맞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결국 암살당했다.
그러나 오라녀 가문은 이후 네덜란드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았다.
오늘날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을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역사와 연결된다.
오라녀, Orange.
네덜란드의 오렌지색에는 독립전쟁과 왕가의 역사가 들어 있다.
책에서 헤이그의 하우스텐보스 궁전을 보면서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의 하우스텐보스도 떠올랐다. 두 번이나 가보려다가 결국 못 갔던 곳인데, 그 이름의 뿌리를 미술책을 읽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미술을 읽다가 축구가 나오고, 일본 여행지가 나오고, 다시 네덜란드 왕가로 돌아간다.
이런 연결도 책 읽는 재미다.
6. 좋은 땅에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땅을 만들어 나라를 세웠다
네덜란드를 보면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땅이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고, 습지와 갯벌이었던 곳을 수백 년 동안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은 토목의 힘으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좋은 땅을 골라 도시를 세운 것이 아니라, 토목의 힘으로 도시가 설 수 있는 땅을 만들어냈다.
연약한 점토와 이탄층 위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목재말뚝을 박고, 제방을 쌓고, 물을 빼고, 운하를 만들며 도시를 넓혀왔다.
그 토목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 지금의 암스테르담 왕궁이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지어진 이 거대한 석조건물 아래에는 목재말뚝이 무려 13,659개나 박혔다.
수많은 말뚝으로 거대한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고 그 하중을 지반에 전달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그 아래에는 1만 3천 개가 넘는 나무말뚝이 박혀 있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려한 시민사회 역시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토목 위에 서 있었던 셈이다.
풍차도 지금은 네덜란드의 낭만적인 풍경을 상징하지만 원래는 물을 퍼내기 위한 중요한 기계였다.
제방, 수로, 운하, 풍차, 간척지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만든 기반시설이었다.
그들에게 풍차와 제방, 운하와 들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물과 싸우며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설이고, 수백 년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국토였다.
그래서 네덜란드 풍경화도 다르게 보였다.
남이 준 자연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물을 막고 퍼내며 만들어낸 땅을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7. 돈이 그림을 바꾸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인도회사가 등장하고 주식이 거래되었으며, 증권거래소가 성장했다.
튤립 한 구근 가격이 치솟았다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튤립 투기까지 벌어졌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돈이 몰리면 사람들이 따라붙고,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며,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림도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왕이나 교회만 그림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상인과 시민이 자기 집에 걸 그림을 샀다.
그 결과 그림의 주제도 달라졌다.
성모와 성인뿐 아니라 부엌과 식탁, 술집과 학교, 가족과 거리, 꽃과 음식, 풍경이 중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미술이 시민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8. 시장은 자유를 주었지만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시민 미술시장의 성장은 화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교회나 왕실의 주문만 기다리지 않고 시장을 상대로 자신의 그림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가들에게 좋은 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경쟁자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매자의 취향과 유행에 맞는 그림이 잘 팔렸고, 화가들은 특정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가격경쟁을 해야 했다.
후원자의 지시에서 조금 벗어난 대신 시장의 선택을 받아야 했다.
렘브란트처럼 큰 명성을 얻은 화가도 말년에 재정적으로 무너졌다. 그의 파산에는 비싼 집과 수집품 구입, 수입의 변화 등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고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페르메이르 역시 죽은 뒤 가족에게 상당한 빚을 남겼다.
시민이 새로운 미술 소비자가 된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그러나 시장은 화가에게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실패의 위험도 화가 개인에게 떠넘겼다.
이것 역시 네덜란드 미술 황금기의 한쪽 얼굴이었다.
9. 잘살면서도 ‘다 소용없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를 무조건 자랑한 것은 아니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비싼 그릇과 과일, 꽃과 책을 늘어놓고 그 옆에 해골이나 시든 꽃, 꺼진 촛불을 넣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죽으면 끝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참 인간답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장사하고 투자하면서, 그림에서는 재물의 허무함을 경고한다.
튤립에 돈을 쏟아붓던 사람들과 바니타스를 그려 걸어놓던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 살았다.
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부를 경계했다.
그 긴장이 네덜란드 황금기의 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10. 그림 속에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
풍속화가 커진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얀 스텐의 그림에는 술 마시는 사람, 떠드는 아이, 엉망이 된 집안, 학교에서 장난치는 학생들이 나온다.
성인도 영웅도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다.
그러나 웃기기만 한 그림은 아니다.
흐트러진 집안, 술 취한 사람,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모습에는 사치와 방종, 교육과 가정생활을 풍자하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얀 스텐을 보고 있으면 김홍도의 풍속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시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시민이 그림을 사기 시작하면서 시민 자신도 미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11. 풍경화는 조국을 그리는 그림이었다
네덜란드 풍경화도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보기 어려웠다.
풍차, 운하, 제방, 낮은 들판은 네덜란드인이 수백 년 동안 물과 싸우며 만들어내고 지켜낸 삶의 공간이었다.
독립전쟁까지 거친 뒤에는 의미가 하나 더 생겼다.
스페인과 싸워 지켜낸 자신들의 나라였다.
그러니 그 들판과 하늘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들의 국토를 그리는 일이기도 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과 생활의 터전이 네덜란드인에게는 직접 만들고 지켜낸 세계였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일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12. 렘브란트는 단체사진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렘브란트의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의 몰입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미레벨트가 그린 해부학 강의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했다.
미레벨트의 그림 속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표정이 다소 굳어 있고 멍하게 보인다.
반면 렘브란트의 사람들은 다르다.
누군가는 시신을 보고, 누군가는 튈프 박사의 손동작을 보고,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설명을 듣는다.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
양정무도 이 장면을 열띤 강의현장처럼 설명한다.
렘브란트는 단체초상화를 그리면서 사람을 단순히 줄 세우지 않았다.
미레벨트가 해부학 강의의 참석자를 그렸다면, 렘브란트는 강의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래서 400년 전 강의실의 분위기가 지금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13.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바로크의 다른 얼굴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비교하면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의 차이가 그림에서도 보인다.
루벤스의 그림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가톨릭교회와 궁정의 주문을 많이 받았던 그의 작품에는 거대한 공간을 채우는 힘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과 표정, 빛의 방향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카라바조의 빛이 사건을 드러내는 빛이었다면, 렘브란트의 빛은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바라보는 빛에 더 가까워 보였다.
같은 바로크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지역과 종교, 주문자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만들어졌다.
바로크가 반드시 화려해야만 바로크인 것은 아니었다.
14. 할스는 순간을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시간을 멈췄다
프란스 할스는 빠른 붓질로 사람의 표정과 움직임을 잡아냈다.
정교하게 마감하기보다 순간의 생기를 살렸다.
그래서 수백 년 뒤 인상파 화가들이 그의 붓질에 주목했다는 설명도 이해가 갔다.
페르메이르는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비롯한 그의 그림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방 안의 고요함,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을 바라본다.
카메라 옵스큐라 같은 광학기구가 당시 화가들의 시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종교전쟁으로 시작한 북유럽 바로크의 이야기가 시민의 일상을 지나 과학과 광학기술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렘브란트, 할스, 페르메이르는 같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지만 사람과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네덜란드 미술의 폭을 보여준다.
15. 북유럽 바로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로마 바로크에서는 거대한 성당과 조각, 교황과 예술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북유럽 바로크에서는 사람이 더 가까이 보였다.
돈을 버는 상인, 그림을 사는 시민, 술집에서 떠드는 사람, 학교에서 장난치는 아이, 해부학 강의를 듣는 의사,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가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그 변화에는 종교개혁과 독립전쟁이 있었고, 무역과 금융의 성장이 있었으며, 시민 중심의 미술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생활의 밑바탕에는 물과 싸워 땅을 만들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루벤스는 가톨릭 남부의 웅장한 미술을 대표했고, 렘브란트는 사람의 얼굴과 반응을 살려냈으며, 할스는 순간의 생기를 잡았고, 페르메이르는 평범한 일상 속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북유럽 바로크는 내게 교회와 궁정의 미술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그 옆에 시민과 시장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주체가 크게 등장한 시대로 보였다.
그 시장은 그림을 평범한 사람들의 집으로 가져왔지만 화가들에게 치열한 경쟁도 안겨주었다.
로마에서 돔과 광장이 권력과 종교의 무대였다면,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의 집과 창가, 술집과 학교, 운하와 들판이 미술의 무대가 되었다.
풍차는 낭만을 위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물을 퍼내기 위해 돌았고, 그 풍차가 지켜낸 땅 위에서 상인은 그림을 사고, 화가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과 생활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