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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천재 화가의 몰락 
어느덧 렘브란트의 인생에도 어둠이 깊어집니다. 렘브란트가 야간순찰을 그린 1642년, 부인 사스키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티투스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티투스를 돌보려고 고용한 보모와 관계를 맺으면서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밝고 화사한 이탈리아 고전주의 화풍으로 유행이 바뀌면서그림 주문마저 끊깁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애인 헨드리케마저 1663년에 세상을 떠나고, 외아들 티투스도 렘브란트보다 한 해 먼저 숨을 거둡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656년 50세에 접어든 렘브란트는 개인파산을신청합니다. 전성기 시절에 초호화 저택을 매입했다고 말씀드렸죠. 이 저택은 4분의 1만 렘브란트 소유였습니다. 잔금을 연 5퍼센트씩 나누어 갚는 조건으로 계약했거든요.- P440
렘브란트, 클라우디위스 시빌리스의 음모, 
1661~1662년경, 스웨덴 국립미술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네덜란드 지도자들의 모습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냈지만 당시 시 정부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P444
마지막 기회마저 허무하게 날아갔군요.
렘브란트는 여기서 좌절을 넘어 최악의 모욕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를 지켜주던 가족마저 잃은 렘브란트는 1669년 63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P444
프란스 할스도 말년이 고달팠나요?
맞습니다. 1652년 프란스 할스는 개인파산을 신청했는데요. 재산 경매 목록을 보면 그의 빈곤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렘브란트의 경매 목록에는미술 걸작과 값비싼 물품이 가득했지만, 할스는 매트리스 세 개, 테이블하나, 그림 다섯 점이 전부였으니까요. 파산 이후, 할스는 다행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게 됩니다.- P447
신비한 분위기가 보는 이의 마음을 단번에 잡아끄는 명작입니다. 얼핏 평범한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정 인물이 아닌 이상적인 인물을 상상해서그런 것 같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빛나는 눈동자가 매력을 더합니다. 그림의 백미는 진주 귀걸이죠.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는 평면에 그려졌는데도 매끄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적인데요. 페르메이르는 작은점을 겹겹이 찍어 질감을 살리는 유화 기법으로 귀걸이를 강조했습니다.
빛에 반짝이면서도 입체감이 살아있는 귀걸이 때문일까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도 불립니다.- P467
글쎄요, 진리에 정답이 있을까요? 시대가 변하여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있겠지만, 새로움이 더 진리에 가까운 건 아닐 겁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라고 해서 진리로부터 뒤떨어졌다고 볼 수도 없고요. 분명한 건 각각의시대에 걸맞은 방식이 있겠죠. 르네상스는 르네상스만의 방식이 있고, 바로크는 바로크 시대에 맞는 방법이 있었듯이 말이죠. 우리는 르네상스 하면 원근법을 떠올리죠. 바로크에도 이에 대응하는 강력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P469
네덜란드는 80년간 스페인과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후, 독립에 성공한 북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고 공화국을 건설합니다. 네덜란드 황금기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기반으로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는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개인과 공동체가 힘을 합쳐 이뤄낸 하루하루의 평화로운 일상을 소중히 여겼죠. 그걸 그려낸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조금 과장하자면 탈종교, 탈이념을 지향했다고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그림이 유독 많은 이유입니다.- P475
미술은 특정 단어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세력의 정치적 자유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인간 중심 문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한층 높은 단계로 완성된 이유입니다.- P475
15세기에 출발한 인간을 향한 관심은 17세기에 더욱 확장됩니다. 그 열망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들끓던 시대의 에너지와 만나 네덜란드에서 독창적인 미술로 탄생한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종교와 신화속 이야기를 현실과 맞닿게 재해석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시민들이 일군 풍경과 정물을 그림의 소재로 적극 채택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익숙하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으로 시각화한 거죠.
지금까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을 만났습니다. 이제 바다건너 스페인으로 향할 텐데요.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미술이 펼쳐지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P476
황홀한 영광도 잠시,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던 스페인 황금기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영원히 빛날 듯했던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걷는다. 그러나 저무는 해가 오래도록 세상을 얇게 물들이듯이 스페인 바로크 미술은 찬란한 시대의 잔상으로 남아 세계로 퍼져갔다.
-마드리드 왕궁, 스페인- P483
바로크 미술을 이야기하며 스페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페인 바로크미술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미술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나아가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정점을 찍었으니까요.- P485
펠리페 2세의 통치 철학은 ‘가톨릭 군주‘였습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대제국을 가톨릭 신앙으로 묶고자 했죠. 그래서 엘 에스코리알수도원같이 조용한 종교 공간에서 일하기 좋아했습니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스페인 곳곳에 궁전을 보유했는데도 말이죠.- P488
그는 29살인 1556년 왕위에 올라 15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2년간 스페인을 통치합니다. 16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시대였다고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P488
펠리페 2세는 아메리카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포르투갈과 합병하는 등 큰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에 패배하면서 바다에서의 패권을 잃게 됩니다. 신교도를 탄압하여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부추긴 것도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80년간 벌어진 네덜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스페인은 전쟁의 늪에 빠집니다.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은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했지만, 비효율적인 관료 시스템마저 겹치며 나라가 파산하고 맙니다. 스페인은 펠리페 2세가 재위하는 동안 네 차례나 국가 파산을 선언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P489
비록 통치력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지만 미술에 대한 업적은 이견이 없습니다. 스페인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건축물 엘에스코리알수도원 덕분이죠. 펠리페 2세는 즉위한 이듬해 1557년에 숙적 프랑스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날이 성 로렌스의 축일과 같아서 엘 에스코리알을 성 로렌스에게 봉헌합니다.- P489
당시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종교개혁 운동에 앞장선 스페인은 트리엔트공의회가 선언한 미술 강령을 엄격히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 종교미술은 어떤 곳보다 명확하고 단순하며 지적이어야 했고, 사실적이면서도 신앙에 좋은 자극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엘 그레코의 그림은 어수선해 보였을 겁니다.- P518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이탈리아는 그에게 붓을 주고, 스페인은그에게 정신을 주었다‘는 어느 미술사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에게 이탈리아는 그리는 재능을 주었지만, 그 능력을 정서적으로 끌어낸 건 스페인이었으니까요. 이 점이 우리가 엘 그레코를 스페인 화가로 부르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P528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정신을 대표하는 화가다. 엘 에스코리알 프로젝트를 맡•았으나 왕실과 교회의 미감을 충족시키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톨레도에서예술 세계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는 회심의 역작 오르가즈 경의 매장을 탄생시켰다. 이후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여생을 보내며 그린 풍경화는 후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P529
작곡가 로시니가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세빌리아로 제목을 지었지만, 스페인어에 따라 세비야로 부르는 게 옳습니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위치한 도시로,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수도 마드리드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1600년 마드리드 인구가3만 명이었는데요. 당시 세비야의 인구는 1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사실상 규모면에서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의 경제 수도였습니다. 얼마나위용이 대단했는지 ‘세비야를 보지 않고 세상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P531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한 항구로 유명합니다. 이후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교역할 때 가장 중요했던 항구가 바로 세비야였습니다.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끈 막대한 부가 바로 이곳을 거쳐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비야는 바다에서 약 60킬로미터떨어진 내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P532
아니, 그렇게 안쪽에 자리한 도시가 어떻게 항구가 될 수 있었나요?
과달키비르라는 강 덕분입니다.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은수심이 깊고 강폭도 넓어 큰 배들이 강을 따라 세비야와 대서양을 오갔습니다. 왼쪽 위의 그림을 보면 과달키비르강을 통해 수많은 배들이 세비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17세기 후반부터 강에모래가 퇴적되면서 세비야는 항구 기능을 점점 잃게 됩니다.- 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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