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보다 군인에 가까운 기질이어서 결단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결단했고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폭력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습과 규범까지 무시했다. 복잡한 가톨릭 장례 의식을 생략하고 시신을 신속하게 바다에 버리게 함으로써 전염병 확산을 막은 게 대표 사례다.
리스본 항구에 들어온 상선의 물품을 강제로 인수해 참사 이전의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폼발 후작은 리스본을 재건하자고 왕을 설득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직책은 총리였지만 실제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발탁해 재건 계획을 신속하게 세웠다. 마차가 다니는 중심 도로를 넓고 반듯하게 만들고 여러 곳에 광장을 조성했으며 주변 건물의 높이와 형태를 규제하고 건축 자재의 종류를 지정했다.
죄 없이 죽은 이가 없었을 리 없다. 무자비한 독재자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리스본 시민과 포르투갈 국민은 그런 잘못을 용서한 듯하다. 잘못에 비해서 공이 월등히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폼발 후작 동상은 ‘역사의 법정’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리스본을 재건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전권을 맡긴 것 말고 왕이 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공이라면 공이다. 그래서 해일이 잔해를 쓸어간 해변의 왕궁터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왕의 기마상을 세운 것이리라. 왕의 이름을 꼭 알고 싶다면 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폼발 후작 동상 주변의 초록색 비탈은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이고 호드리게스 공원은 그 북쪽 끝에 이어져 있다. 에두아르두 7세는 포르투갈 왕이 아니라 60년 가까이 왕세자로 살다가 늙어서야 즉위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다. 그의 1902년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려고 그토록 잘 보이는 곳에 공원을 만들 정도로 두 나라는 가까웠다.
공원을 나와 폼발 후작한테 인사를 드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이 무언지 생각해 봐.’ 우리는 강을 향해 뻗은 ‘아베니다 다 리베르다드(Avenida da Liberdade)’를 걸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자유로’쯤 되는데 리스본 사람들은 줄여서 ‘아베니다’라고 한다.
‘헤스타우라도르’는 광복(光復)이라는 뜻이다. 누구의 지배를 받았기에 ‘광복 광장’을 만들었을까? 국경을 맞댄 건 스페인뿐이니 다른 나라일 수 없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강국이 되어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이 외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광복 광장’은 포르투갈의 주권 회복을 기념한다. 한가운데 설치한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에 여러 날짜를 새겨두었는데, 1640년 12월 15일이 제일 두드러져 보였다.
명목 국민소득은 서유럽 나라들보다 낮지만, 리스본이나 뽀르투에는 노숙자나 거지가 많지 않다. 물건을 도둑맞을까 걱정하면서 다니지 않아도 된다. 파리나 바르셀로나보다 물가 수준이 훨씬 낮다. 난민이나 불법 체류자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이민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포르투갈말을 쓰는 남미와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한다.
오늘날의 포르투갈 영토는 로마제국 시대 ‘루시타니아’라는 행정구역이었는데 서로마가 무너진 뒤 서고트족과 무슬림이 차례로 지배했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이름은 리스보아(Lisboa)다. 자체 인구는 50만 명, 주변을 포함한 광역 인구는 2백만 명 정도 된다. 상업과 무역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일찍부터 페니키아·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리스보아’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뽀르투가 먼저 무슬림 지배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국호에는 리스본이 아니라 뽀르투가 들어갔다. 포르투갈 왕국이 13세기 중반 국경을 확정했을 때 수도가 된 리스본은 15세기 말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524)의 인도 항로 개척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티앙 1세 왕이 모로코 원정에서 전사한 1578년 길지 않았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나라가 찢어지거나 정복 전쟁의 먹잇감이 되는 시대였다. 스페인 왕국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가 포르투갈 공주였다는 사실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리스본의 귀족들을 회유하고 압박해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섰던 포르투갈이 졸지에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헤스타우라도르 광장 오벨리스크에 제일 크게 새겨 놓은 ‘1640년 12월 15일’은 주앙 4세가 히베이라 궁전 옆 교회에서 대관식을 한 날이다.
포르투갈 왕국은 광복을 이루었을 뿐 국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리스본 대지진의 상처를 다 치유하기도 전에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질이 독립해 나갔다. 포르투갈은 영향력 없는 유럽의 변방 국가로 되돌아갔다.
1910년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을 세웠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에 갇혔다.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했던 시기에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Antonio Salazar, 1889~1970)가 통치했다. 36년 지속한 살라자르 독재는 프랑코 독재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살라자르는 초등교육을 장려한 반면 고등교육은 사실상 폐지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국민을 교육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쓴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지적 수준은 하락했고 과학기술은 퇴보했다.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서도 총리 자리를 지킨 살라자르가 1970년 봄 죽었는데도 포르투갈 사회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혁신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6년 봄 새 헌법에 따라 실시한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중도 진보 성향 마리우 수아레스(Mario Soares)가 총리로 취임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정부는 4월 25일을 ‘자유의 날(Dia da Liberdade)’로 지정함으로써 ‘카네이션 혁명’의 최종 승리를 선포했다.
국가 포르투갈과 도시 리스본은 지금도 살라자르가 저질렀던 저개발 정책과 우민화 정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아무 준비 없이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의 시대를 맞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반도체를 비롯한 기술 집약 고부가가치 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고학력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독재는 나쁘다. 하지만 똑같이 나쁜 건 아니다. ‘개발독재’는 ‘저개발독재’보다 덜 나쁘다. ‘개발독재’도 다 같지는 않다. ‘성공한 개발독재’는 ‘실패한 개발독재’보다 낫다. 한국은 ‘성공한 개발독재’를 겪은 이후 독재는 끊어내고 개발을 이어갔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었고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에 빠르게 적응했다. 포르투갈은 독재 중에서도 최악인 ‘저개발독재’를 겪었다. 독재는 극복했지만 ‘저개발’의 후유증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역사도 필연적 법칙이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포르투갈은 특별히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살라자르가 저개발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기괴한 망상에 빠진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은 무척 다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통 음식을 파는 양편의 식당들은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했다. 광장 이름을 잘 지은 것 같았다. ‘꾸메르시우(comercio)’는 상업 또는 거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 있었던 궁전은 지진에 무너졌고 잔해는 해일에 휩쓸려 사라졌다. 왕은 두려움에 떨면서 벨렝지구의 목조 건물에 머무는 동안 폼발 후작은 왕궁의 폐허를 행정·경제 복합센터로 바꾸었다. 광장 좌우의 정부 청사 건물은 그가 직접 지었고, 시내와 광장을 가르는 개선문은 후임자가 세웠다. 시간이 가면서 주변에 민간 건물이 들어섰고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영업을 시작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광장에서 왕의 즉위식을 비롯한 국가 의전행사를 열었고 군 사령부가 전쟁을 지휘했다.
‘흠, 리스본은 해물 밥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리스본에는 해물 밥 말고도 맛난 음식이 아주 많았다.
꾸메르시우 광장에서 알파마지구로 가다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 기념관을 발견했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리스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노동자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라마구는 번역가·평론가·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작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살라자르 시대에는 독재를 비판하는 정치 칼럼을 썼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창작에 전념하면서 시와 희곡까지 여러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사라마구 전집의 표지 디자인이 특이했다. 제목을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썼는데 책마다 필체가 달랐다. 포르투갈어를 쓰는 창작자들이 손으로 쓴 글씨였다. 3층에 전집 세트를 진열해 두고 2층 서점에서 낱권으로 판매했는데 제목을 쓴 이들은 소설가부터 영화감독과 화가까지 직업이 다양했다.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다니!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기억하고 사랑할 만한 분이 있나?’ 왜 없겠는가. 내 기준으로는 박경리와 최인훈이 있다. 박완서와 황석영도 그럴 만하다. 한강은 이미 많은 작품을 썼고 앞으로 더 많은 소설을 낼 것이다.
산 감천 문화마을과 통영 동피랑 마을이 떠올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오래된 집, 강렬한 색을 칠한 벽화, 노점의 음식 냄새, 서로를 구경하는 사람들,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과 분위기였다. 하지만 알파마는 그저 오래된 곳이 아니라 긴 세월 가꾸고 다듬고 꾸민 동네여서 후미진 골목의 어느 귀퉁이도 버려진 데가 없었다.
폐허가 된 바이샤와 달리 알파마가 대지진을 견뎌냈다는 사실은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지진을 신의 징벌로 여긴 시대였다. 신은 왜 바이샤의 왕궁과 성당과 저택을 무너뜨려 왕족과 귀족과 성직자들을 죽이면서 알파마의 가난한 노동자와 선원과 몸 파는 여인들은 살려두었는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신학자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지진은 리스본의 성당만 무너뜨린 게 아니라 유럽의 종교 권력도 무너뜨렸다. 신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인간과 세상을 구하려는 새로운 사상에 힘을 불어넣었다.
파두는 슬프다. 멜로디와 노랫말과 창법이 다 애절하다. 어부·노동자·집시와 같은 이들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달콤하다. 듣고 나면 또 듣고 싶다. 비평가들은 ‘사우다드(saudade)’를 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향수(鄕愁) 또는 그리움이라고 번역하는데 우리말 한(恨)과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나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사우다드’는 사람을 주저앉게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 살아가게 한다. 조심하자. 이건 ‘리스본 파두’ 이야기다. ‘꼬임브라 파두’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유럽 도시들은 ‘오버투어리즘’ 몸살을 앓고 있다. 명성 높은 박물관과 왕궁과 성당만이 아니라 이름난 레스토랑·와인 바·재즈클럽도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알파마지구도 그랬다. 파두 박물관 맞은편 길 건너 식당에 갔더니 빈자리가 없었다. 혹시 ‘노쇼’가 있을지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미련을 접고 이틀 후 자리를 예약한 다음 길 찾기 앱에서 제일 비싼 파두 레스토랑을 골랐다. ‘여긴 자리가 있을지 몰라. 비싸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키 크고 잘생긴 젊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딱 두 자리가 남아 있거든요.’ 역사가 백 년 가깝다는 그 집은 실내 공간이 들쭉날쭉했는데 입구 반대편 끝의 쓰지 않는 벽난로 앞 조그만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