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대장정 서재
  • 유럽 도시 기행 3
  • 유시민
  • 17,010원 (10%940)
  • 2026-07-09
  • : 116,200
[독서감상문]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
―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저자의 시선을 따라 걷다가 내 생각으로 멈춰 서다

『유럽 도시 기행 3』의 네 도시 가운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읽었다. 두 도시는 모두 스페인에 있지만 책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나라의 도시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역사와 표정을 가지고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왕조와 내전, 프랑코 독재와 민주화의 역사가,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과 카탈루냐의 오랜 비극적 역사의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의 도시 여행은 유명 관광지를 차례로 찾아가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길과 건축물, 미술관과 광장에 남아 있는 역사를 찾아내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재의 도시와 연결한다. 내가 여행하면서 좋아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유적이나 건축물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기보다 그것이 왜 그곳에 있고, 누가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1. 마드리드 ― 그림을 통해 읽는 스페인의 역사

마드리드에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역시 스페인의 근현대사와 미술이었다. 프랑코 독재와 스페인 내전, 민주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특히 고야가 인상적이었다. 궁정화가로 출발했지만 전쟁과 폭력, 인간의 잔혹함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미술작품이 한 시대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마찬가지다. 그림 한 점이 전쟁의 참혹함을 세대를 넘어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시선으로 그 시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연결을 잘한다. 역사와 미술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읽게 만든다.

2. 바르셀로나 ―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에 들어오면서 책은 더욱 재미있어졌다. 무엇보다 가우디가 있었다.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성가족 성당’이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지만 『유럽 도시 기행 3』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쓴다. 처음에는 ‘사그라다’라는 말이 낯설었다. 파밀리아가 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같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바로 짐작했지만, ‘사그라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뜻을 알고 보니 나는 오히려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번역해버리면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들리는 이름이 원어를 살리니 고유명사로서의 느낌도 살아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사그라다라는 표현을 꽤 오래전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무지의 소치다.

저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면서 종교적 경건함보다 예술적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가우디 자신은 깊은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열정을 모두 담았겠지만 자신은 그 가운데 예술적 열정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도 좋았다. 같은 건축물을 보더라도 누구나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종교 건축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놀라움은 눈에 보이는 장식에만 있지 않다. 가우디의 곡선과 기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현수선 원리를 뒤집은 아치와 가지처럼 갈라지는 수목형 기둥은 하중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고, 다양한 곡면의 기하학적 구조는 건축적 안정성과 공간의 개방감, 자연채광을 함께 만들어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예술적 상상력과 구조역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 합쳐진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건축물을 두고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의 최고 수준’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3. 평생을 건축에 바치고 그곳에 잠든 가우디

가우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다. 평생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에 매달렸던 사람이 미사를 보러 가던 길에 노면전차 사고를 당했고,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신원 확인과 적절한 구조가 늦어졌다. 그는 결국 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의 작품은 화려하고 거대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쓸쓸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평생을 바친 성당에 잠들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한 인간의 삶과 건축이 마지막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이야기할 때 앞으로는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외관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안에는 평생을 한 건축물에 바치다 길에서 쓰러진 한 사람의 삶도 함께 들어 있다.

4.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과 자기합리화

그런데 저자의 바르셀로나 여행 방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건너뛰었다고 했다. “한 도시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하나만 본다는 나만의 규칙”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바다의 성모 성당’은 예외로 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어이가 좀 없었다.

예외로 했으면 규칙을 지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여행에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일정이 빠듯하거나 다른 곳을 더 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뛸 수도 있다. 그것은 여행자의 선택이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 역시 여행하면서 시간 때문에 보고 싶은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어이없어 한 것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한 도시에서 성당은 하나만 본다’는 원칙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누가 한 도시에서 성당을 두 군데 보았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곳이면 보면 되고 시간이 없으면 건너뛰면 된다. 그런데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을 지켰다고 말한 바로 다음에 다른 성당은 예외로 보는 것은 조금은 자기합리화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한 것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단순히 ‘성당 두 개’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두 건축물은 지어진 시대도 다르고 건축양식도 다르며 도시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성격도 다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중세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대성당까지 이미 본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오히려 반대다. 멀리 왔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보고 싶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새벽 네 시, 다섯 시에도 일어난다. 사람이 몰려오기 전에 한가하게 장소를 보고, 사진을 찍고, 오전 일정을 일찍 시작해 오후에는 또 다른 곳을 찾아간다. 같은 종류의 유적이라도 시대와 역사와 이야기가 다르면 각각 볼 이유가 있다.

5. ‘귀족의 성당’과 ‘민중의 성당’이라는 선명한 구도

‘바다의 성모 성당’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저자 특유의 시선도 드러난다.

그는 지배자와 귀족과 부자들이 고딕지구에 대성당을 지었던 시기에 가난한 어부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바닷가에 자신들의 성당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쓰면 두 성당은 자연스럽게 권력과 부의 성당 대 가난한 민중의 성당이라는 구도로 나뉜다.

물론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성당 건축에 참여하고 힘을 보탠 것은 중요한 역사다. 그러나 실제 도시의 사회구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두 편으로 갈리지 않는다. 바닷가 지역에는 어부와 노동자뿐 아니라 상인과 다양한 계층이 함께 살았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글을 조금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역사 자체와 저자의 해석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책에는 당연히 저자의 시선이 들어간다. 오히려 그것이 여행기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다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도 독자는 어느 순간 자기 눈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6. 카탈루냐 ―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내려놓는 것

카탈루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졌다. 1714년의 패배와 자치제도의 상실, 오랜 지역 정체성, 그리고 2017년 독립 주민투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 오늘날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더 큰 공동체를 만들려면 과거의 적대적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전쟁 기억과 한국전쟁을 예로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남과 북이 언젠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전쟁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원한을 영원히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기억을 지운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오히려 잘 기억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야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기억을 지워버린 뒤 훗날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머리를 긁적여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한의 대물림을 멈추는 일이다.

역사는 기억하고, 잘못은 인정하되, 그 증오까지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이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은 저자가 던진 문제에는 공감했지만 그가 선택한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7. 저자가 지나친 또 하나의 카탈루냐 ― 조지 오웰

카탈루냐 이야기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오른 책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다.

책의 제목만 보면 카탈루냐 민족주의나 독립운동을 찬양한 책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웰은 카탈루냐 독립을 위해 스페인으로 간 사람이 아니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 진영에서 직접 총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느끼는 것은 카탈루냐 분리주의보다는 국경을 넘어 자유를 지키려 했던 국제적 연대에 더 가깝다. 동시에 오웰은 그 전쟁 속에서 같은 편끼리 서로를 적으로 몰아붙이고 진실마저 정치에 따라 왜곡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민음사판 『카탈로니아 찬가』의 표지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국제여단 병사들이 걸어오는 흑백사진이다. 오른쪽 끝에는 유난히 체격이 큰 병사가 힘차게 걷고 있고, 왼쪽 끝에는 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병사가 있다. 그 사이로 총을 든 병사들이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의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인데도 구도가 기막히게 좋다. 오래전에 본 책의 표지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저자가 카탈루냐의 역사와 정치적 정체성을 이만큼 이야기하면서 오웰과 『카탈로니아 찬가』를 지나친 것은 내게는 조금 아쉽다. 물론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바르셀로나를 읽는 방식에는 오웰도 분명히 들어 있다.

8. 그리고 몬주익 ― 나는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바르셀로나 편에서 가장 섭섭했던 대목은 몬주익이었다.

저자는 몬주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지나간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언덕 오르막에서 치고 나와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

그게 전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황영조를 폄하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한 문장이 못내 섭섭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인 저자로서 이를 좀더 비중있게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다. 한국인이었지만 자기 나라의 태극기를 가슴에 달 수 없었다. 그리고 56년이 지난 1992년, 황영조는 대한민국의 이름과 태극기를 달고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오르막을 넘어 올림픽 마라톤 정상에 섰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한 나라에서 몇십 년을 기다려도 다시 나오지 않을 수 있는 성취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4년에 한 번 모여 42.195km를 달리고,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황영조 개인이 훗날 어떤 구설에 올랐는지는 그날의 성취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몬주익의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다른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서는 여러 문단을 써가며 의미를 찾아내던 저자가 이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이것을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인 독자로서는 적어도 한 문단 정도는 황영조가 그 언덕에서 만들어낸 엄청난 성취와 그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해주었으면 했다.

섭섭했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내 시선이 가장 분명하게 갈린 대목 가운데 하나였다.

9.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반대로 저자가 여행을 이야기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면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고도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 걸리는 데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멀리 갈 이유가 있는가. 책이 좋으면 집에서 읽으면 되고, 맛있는 음식이 좋으면 가까운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내게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문장을 조금 바꾸고 싶다.

“내게 여행은 멀리 가서,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게 여행은 좋아하는 것을 만나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다.”

역사유적을 직접 찾아가고, 책에서 읽었던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고, 웅장한 자연 앞에 서서 걷는 것. 그래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저자의 여행법과 내 여행법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내가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가 더 분명해졌다.

10. 저자를 따라 걷되, 내 눈으로 보는 도시

『유럽 도시 기행 3』의 스페인편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시선을 많이 따라갔다.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 고야와 피카소를 만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와 카탈루냐의 오랜 기억을 만났다.

좋았던 이야기도 많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고, 가우디의 안타까운 마지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카탈루냐의 역사에서 ‘기억과 공동체’라는 문제를 끌어낸 것도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뛴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행에는 언제나 시간의 제약이 있다. 다만 그것을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으로 설명하고 곧바로 다른 성당에는 예외를 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표현에는 처음 공감했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카탈루냐를 읽으며 저자가 지나간 조지 오웰을 나는 다시 불러냈고, 몬주익에서는 저자가 한 문장으로 지나친 황영조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재미있다.

저자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읽다가 “그건 좀 아닌데”, “왜 거기를 건너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고 멈춰 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는 책일 수도 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저자를 따라 걸었지만 곳곳에서 내 생각으로 멈춰 섰다. 프랑코와 고야, 피카소와 가우디, 카탈루냐의 기억과 오웰의 국제여단, 그리고 몬주익의 황영조까지.

도시는 저자가 보여주었지만, 그 도시에서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는 결국 내가 결정했다.

그것이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