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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의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뽀르투를 다녀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이었으나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어 문명사의 진로를 크게 바꾸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를 이루고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었지만, 경제와 정치 등 여러 면에서 이웃 나라들보다 뒤처져 있다.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에서는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반드시 보아야 할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전보다 ‘놀러 다닌 이야기‘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다녀본 도시 중에 고르라면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 가운데 하나를 뽑겠다. 체류 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면 바르셀로나, 보름 정도면 리스본, 열흘 이내라면 뽀르투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재미난 곳은 바르셀로나, 제일 독특한 도시는 뽀르투였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문화양식의 차이가 분명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 속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땅을 되찾았지만, 언어와 건축과 예술 등 문화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의 흔적이 남았다. 피레네산맥 동쪽의 유럽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도 소문만큼 치안이 나쁘지는 않았고, 리스본과 뽀르투는 긴장을 풀고 다녀도 괜찮았다.
마드리드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스페인어는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루어 낸 까스띠야 왕국의 언어인 ‘까스떼야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까딸루냐말인 ‘까딸란‘이 제1공용어이고 스페인어는 제2 공용어다. 리스본과 뽀르투 사람은 다 포르투갈어를 쓴다. 세 언어 모두 경음이 흔하다. ‘c‘는 ‘‘이나 ‘ㅆ‘, ‘t‘는 ‘ㄷㄸ‘, ‘p‘는 ‘ㅂ‘ 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규칙에따르면 ‘c’는 ‘ㅋ‘이나 ‘ㅅ‘, ‘t‘는 ‘ㅌ‘, ‘p‘는 ‘ㅍ‘으로 적어야 한다. 뜻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듣는 맛이 크게 달라진다.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무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문어 때문이었다. 문어는 스페인어로 ‘뿔뽀(pulpo)‘, 포르투갈어로 ‘뽈보(polvo)‘인데 우리는 여행을 다니며 줄곧 이탈리아어 ‘뽈뽀(polpo)‘를 썼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뿔뽀, ‘뽈보‘, ‘뽈뽀‘는 쫄깃한 식감을 전해 주지만 ‘풀포‘, ‘폴보‘, ‘폴포‘는 그렇지 않다. 축 늘어져 맛이 없는 것 같다. ‘따빠(tapa)‘와 ‘삔초(pincho)‘도 마찬가지다. ‘타파‘와 ‘핀초‘는 맛이 없는 소리다. 쎄비체(cebiche)와 ‘깔라마리(calamari)‘도 그렇다. ‘세비체‘나 ‘칼라마리‘라고 하면 입안에 군침이 돌지 않는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식 이름뿐 아니라 사람과 지역 등 고유명사도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었다. 다만 널리알려진 단어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을 따랐다. 예컨대 피카소,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봐. 걸음을 아예 멈추면 더 좋아. 가까이 있는데도 몰랐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이미 지나간 것과 돌이킬 방법이 없는 일은 잊고, 영원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을 접고, 내일에 대한 근심을 던져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봐. 오늘, 이 순간을 즐겨.
피낯선 도시의 새로운 길을 걸으며, 가슴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껴안아 봐. 삶은 길 위에 있는지도 몰라.‘ 독자들도 그런 환청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2026.08.05인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열여섯 시간 걸려 ‘아돌포 수아레스 마드리드-바라하스 공항‘에 안착했다. 북한 영공을 우회하고 우크라이나 상공을 피하느라 항로가 예전보다 길어졌다.
‘바라하스(Barajas)‘는 공항이 있는 마드리드 외곽의 동네 이름이라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AdolfoSuárez, 1932~2014)‘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화폐에 조선시대 사람들을 넣었고 광화문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으나 인천 공항에는 아예 사람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인물에 대해서는 소위 ‘국민적 합의‘라는 걸 이루지 못해서 어디에도 넣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이 살짝 부러웠다.
프랑스 파리에는 샤를 드골 공항, 미국 뉴욕에는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 있다. 스페인 국민에게는 수아레스가 그런 의미를 가진사람이다
독재자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철권통치를 시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기독재였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의 예고편이었다. 20세기의 모든 이념이 충돌해 참혹한 비극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의 어린 아들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1938~)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즉위하지 못하게 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을 동원해 무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학살·언론탄압·인신매매 등의 악행을 저질렀던그는 1975년 노환으로 죽었다.
수아레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를 지키면서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을 꾸짖었다. 카메라가 그 광경을 포착해 국민에게 보여주자, 비난 여론이 폭발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스페인 민주화는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사회의 역사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정식 국호가 에스파냐 왕국(Reino de Espana)인 스페인은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유로를 화폐로 쓴다. 국토가 한국보다 다섯배 넓지만, 인구는 5천만 명 정도로 거의 같으며, 평균수명과 1인당 국민소득도 큰 차이가 없다.
한국과 다른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것 같지 않다. 국민 열 명 가운데 여섯 정도는 가톨릭 신도이다. 스페인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 세력이 미약하다.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은 언어·건축·음악·미술·공예 등 거의 모든 영역에 남은 이슬람의 흔적이다.
피스페인은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나뉘는데, 산맥 동쪽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아프리카‘로 취급했다.
스페인은 택시 요금이 싼 편이다. 파리나 런던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느낌으로는 서울 택시 요금과 비슷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요금이 더 저렴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이번처럼 자주 택시를 탄 적은 없었다.
마드리드도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미술관과 공연장뿐만 아니라 식당과 술집도 시간을 정해 입장권을 예매해야 하는 곳이 많았다.
콜론은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콜럼버스의 스페인 이름이고 세라노 공작은 이사벨 2세의 외무장관이었다
한때 여왕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그는 1868년 자유주의 혁명군을 이끌고 정부를 공격해 여왕을 프랑스로 쫓아내고 공화정을 세웠다. 군부의 공격에 금방 무너져 왕정복고를 허용했지만, 그 정부는 스페인 최초의 공화정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베리아‘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최초의 인간 집단 ‘이베로‘ 부족은 3,600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거나 해변을걸어서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철기를 들고 남하한 셀따(켈트)족이 이베로 부족과 결합해 오늘의 스페인 사람과 관련이있는 셀띠베로(celtibero) 부족을 형성했다.
피서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 이후에는 게르만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토착민과 손잡고 똘레도에 왕국을 세웠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에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이 ‘무어인‘ 또는 ‘베르베르인‘이라고도 했던 북아프리카 무슬림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부 해안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반도 전역을 점령했다
기독교인들은 북부 산악지역에서 최초의 저항군을 조직한 후 7백 년 동안 싸운 끝에 무슬림을 축출하고 땅을 되찾았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레콩키스타’는 그들이 만든 말이다. 보통 ‘재정복(再征服)‘이라 번역하는데 ‘수복(收復)‘ 또는 ‘탈환(奪還)‘으로 이해하면 된다.
스페인은 147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연합 왕국 창설을 계기로 통합을 향해 나아갔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혼인을 비즈니스로 여겼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혼인도 그랬는데 경위가 특이했다. 왕위 계승권을 빼앗길 위험에 직면해 있었던 둘은 권력 공유에 합의하고 1469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에서 남몰래 혼인했으며, 숱한 위기를 이겨내고 십 년을 버틴 끝에 왕좌에 올라 ‘에스파냐 왕국‘을 창설하고 ‘공동왕‘으로서 각자의 영토를 다스렸다.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신항로 개척을 지원했고 광대한 해외 영토를 확보했다. 에르난 꼬르테스와 프란시스꼬 삐사로가 총과 균으로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과 페루의 잉카제국을 무참히 파괴한 뒤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았다.
자녀는 모두 이웃 나라 왕가와 정략결혼했는데 큰딸 이사벨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들 후안은 병으로 죽었다. 셋째 딸 마리아는 형부였던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혼인했고 막내딸 캐서린은 영국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
정말 가치있는 예술품인지 의심하는 내게 ‘엘체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재와 예술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야. 대중이 좋아하면 가치가 생기는 거야.‘
‘아름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대상 자체인가, 아니면 대상을 포착하는 인간의 감각인가?
‘스페인이 무엇인지 묻지 마.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의 모든 도시에서 네가 보고 겪고 마주치는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스페인 땅에 있는 모든 것, 스페인 사람이 가진 모든 것, 그게 스페인이거든!
바르셀로나에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은 ‘왕의 광장‘ 하나뿐이었다. 안달루시아나 바스끄 지역도 크게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무엇이 스페인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걸까?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찾자면 축구와 음식 정도일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페인은 식당마다 음식 맛이 달랐다. 이름이 같은 음식도 재료와 조리법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커피 맛만큼은 같았다.
꼬르따도는 ‘끊는다’는 뜻인데, ‘따’에 악센트를 넣고 길게 소리를 낸다. 서둘러 우유를 끊으면 꼬르따도가 되고 여유 있게 끊으면 플랫 화이트에 가까워진다. 잔이 작아서 카페라테 수준까지 우유를 넣을 수는 없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어디서나 아메리카노·카페라테·카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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