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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 만년필입니다!
  • 박종진
  • 13,500원 (10%750)
  • 2013-11-30
  • : 793
[만년필 에세이 2] 내 책상 위의 만년필 2
- 쉬는 만년필도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나는 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 이야기를 했다.

사진만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 가진 만년필은 저게 전부인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은 언제나 일부일 뿐이다.

사용하지 않는 만년필들은 따로 보관함에서 쉰다. 나무 보관함도 있고, 오래 아껴 온 만년필들을 넣어 둔 보관함도 있다. 뚜껑을 열면 각자 제자리에 누워 있는 만년필들이 조용히 쉬고 있다.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들이 현역이라면, 보관함 속 만년필들은 잠시 휴식 중인 셈이다.

한동안 책상 위에서 함께 지내던 만년필들은 보관함으로 들어가고, 대신 다른 만년필들이 나온다.

나는 혼자서 이걸 ‘교대‘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같은 만년필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 심심해진다.

만년필이 싫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녀석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보관함을 연다.

오늘은 누구를 데려올까.

뚜껑을 열고 한 자루씩 바라보다 보면 예전에 자주 쓰던 만년필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이번에는 네 차례다.‘

그렇게 다시 책상 위로 나온 만년필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갑다.

물론 늘 반갑게 인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관하기 전에는 잉크를 비우고 세척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사람 일이 늘 그렇듯 가끔은 깜빡한다.

‘다음에 또 쓰지 뭐.‘

하고 잉크를 채운 채 그대로 보관함에 넣어 둔 만년필이 하나쯤 생긴다.

몇 달 뒤 그 녀석을 다시 꺼내 보면 역시나 쉽게 써지지 않는다.

종이 귀퉁이에 선을 몇 번 그어 보고, 휴지에도 대 본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다.

세면대로 직행이다.

따뜻한 물을 조금 틀어 놓고 펜촉을 씻어 준다.

살살 마사지를 해 준다.

한참 그러고 나면 굳었던 잉크가 조금씩 풀린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종이에 첫 획을 그어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잉크가 흘러나온다.

그럴 때면 괜히 웃음이 난다.

˝인자 됐네.˝

만년필은 저마다 성격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일본 세일러 만년필은 참 부지런하다.

프로기어 화이트 로즈골드에 사쿠라모리 잉크를 넣어 두고 정말 깜빡한 채 거의 2년을 보관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야 생각나 꺼내 들었는데 얼마나 부드럽게 써지던지.

‘워매... 스케이트여. 스케이트.‘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반면 파카 듀오폴드 핀스트라이프는 내 것만 그런지는 모르겠다. 조금 오래 두었다 쓰면 잉크 흐름이 박하다. 첫 획부터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다. 몇 번이고 달래 줘야 그제야 제 모습을 찾는다.

몽블랑은 대체로 든든한 편이다.

엊저녁에는 어린왕자 여우 시리즈 르그랑의 뚜껑을 열어 둔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고, 내가 미쳤구나.‘

싶었다.

하룻밤 내내 뚜껑이 열린 채 있었으니 당연히 안 써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종이에 대 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술 써 내려간다.

혼자 피식 웃었다.

‘역시 너는 믿음직하구나.‘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쓰고 있는 만년필들의 이야기다.

같은 모델이라도 사람마다 경험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만년필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책상 위에 있는 몇 자루만으로도, 아니 한자루로도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다른 만년필을 꺼내는 이유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금 다른 기분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다.

사람도 매일 같은 옷만 입고 살지는 않는다.

기분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 나는 그날의 마음에 따라 만년필을 바꾼다.

그렇게 교대를 마친 만년필들은 다시 책상 위에서 한동안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자를 쓰고, 시를 필사하고, 메모를 남기고, 또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다.

그러다 다시 보관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만년필이 책상 위로 나온다.

내 책상 위의 만년필은 그렇게 조금씩 얼굴을 바꾸며 오늘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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