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3]
후지산의 구름이 만년필에 머물다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운케이 네 자루
이번 후지산 여행에서 새삼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구름이었다.
신칸센 창밖으로 처음 만난 후지산도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타누키호에서도 후지산은 커다란 구름에 가려졌다가 다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어떻게 지나가느냐에 따라 후지산의 표정은 계속 달라졌다.
어떤 순간에는 정상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조금 뒤에는 구름 속으로 반쯤 숨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플래티넘도 그 구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2023년, 후지산과 그 주변을 흘러가는 구름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을 주제로 새로운 #3776 센추리 시리즈를 시작했다.
후지운케이(富士雲景, ふじうんけい, Fuji Unkei) 시리즈.
‘雲景’.
말 그대로 구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2023년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에서 시작해 2026년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까지 모두 네 자루가 나왔다.
첫 번째는 2023년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
두 번째는 2024년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
세 번째는 2025년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
그리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2026년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다.
구름이라는 것은 잡을 수도 없고 한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생겼다가 사라지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몇 분 사이에도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플래티넘은 그런 순간의 구름을 만년필에 붙잡아두었다.
鱗雲.
霞.
絹雲.
雲海.
하늘에서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풍경이지만 만년필 안에서는 그대로 머문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다시 들여다보니 만년필의 색과 무늬보다 오히려 실제 풍경이 궁금해졌다.
저 만년필에 담긴 구름을 후지산에서 직접 만나려면 언제 가야 할까.
그리고 어디에서 기다려야 할까.
1.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 ― 비늘처럼 펼쳐진 구름
2023년 첫 번째 작품.
鱗은 비늘이다.
鱗雲은 작은 구름들이 하늘에 촘촘하게 늘어서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이는 구름을 말한다.
우리말로 하면 비늘구름이다.
플래티넘은 후지산 주변 하늘에 펼쳐진 이 불규칙한 비늘구름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 시리즈에서 사용했던 규칙적인 무늬와 달리 일부러 불규칙한 패턴으로 몸체를 가공했다.
몸체의 오목한 절삭면에 빛이 들어오면서 복잡하게 투과되고 반사되도록 만든 것이다.
첫 작품부터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런데 만년필보다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실제 후지산 위에 저런 비늘구름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려면 언제 가야 할까.
비늘구름은 일본에서도 흔히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구름이다.
따라서 노린다면 9월에서 11월 무렵이 좋다.
특히 공기가 맑아지고 후지산의 윤곽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에 높은 하늘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장소를 고른다면 후지산과 넓은 하늘을 함께 볼 수 있는 가와구치호 북안이나 오이시공원 같은 곳이 먼저 떠오른다.
호수와 후지산을 함께 두고 그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을 볼 수 있으니, 비늘구름이 제대로 떠준다면 鱗雲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름은 호수가 아니다.
“오늘 鱗雲을 보러 왔습니다.”
한다고 기다려주는 녀석이 아니다.
그날 하늘이 허락해야 한다.
후지산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에는 비늘구름이 펼쳐져야 한다.
벌써 난이도가 높다.
그래도 눈앞의 후지산 위로 비늘처럼 촘촘한 구름이 한꺼번에 펼쳐진다면 기다린 보람은 충분할 것 같다.
2.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 ― 봄날 흐릿하게 번지는 후지산
2024년 두 번째 작품.
霞.
카스미다.
우리말로 옮기면 안개나 아지랑이처럼 먼 풍경이 희미하게 보이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봄 풍경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로 사용해왔다.
플래티넘은 옛 그림 두루마리나 병풍에서도 볼 수 있는 ‘카스미몬(霞文, かすみもん)’이라는 전통적인 안개무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몸체에 작은 원형의 절삭을 이어가면서 안개가 길게 흘러가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이 만년필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후지산 여행에서 피하려고 하는 풍경을 오히려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후지산을 보러 갔는데 산이 희뿌옇게 보이면 보통은 아쉽다.
“아이고, 오늘 시야가 왜 이래.”
그런데 霞를 보러 간 여행이라면 이야기가 반대다.
후지산이 살짝 흐릿해야 제맛이다.
이 풍경을 노린다면 봄이다.
3월에서 5월 무렵.
겨울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풀리고, 따뜻해진 공기 속에서 먼 후지산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다.
봄철 가와구치호 북안에서 호수 너머로 살짝 흐려진 후지산을 만난다면, 이번 겨울에 보았던 또렷한 후지산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일 것이다.
산이 쨍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여행.
생각해보면 그것도 재미있다.
“오늘은 후지산이 흐릿해서 잘 봤다.”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3.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 ― 비단실처럼 하늘을 흐르는 구름
2025년 세 번째 작품.
絹은 비단이다.
따라서 絹雲은 비단처럼 얇고 가느다란 구름이라는 뜻이다.
보통 기상학에서 말하는 권운(巻雲, けんうん), 즉 cirrus를 가리킨다.
하늘 높은 곳에 가늘고 섬유처럼 길게 늘어지거나 깃털처럼 퍼지는 구름이다.
플래티넘은 그 모습을 ‘광선조각’과 ‘V날 조각’이라는 두 종류의 가공으로 표현했다.
몸체 전체를 무늬로 꽉 채우지 않고 일부러 조각하지 않은 부분도 남겨두어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듯한 공간까지 살렸다.
구름 하나 표현하려고 만년필 몸체를 여기까지 파고드는 걸 보면 참 집요하다.
이 풍경은 특정 계절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
권운은 사계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絹雲을 만나러 가는 여행은 달력보다는 하늘을 봐야 한다.
푸른 하늘이 열려 있고,
높은 곳에는 가느다란 비단실 같은 구름이 흐르고,
그 아래 후지산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날.
그 순간이 만년필 속 絹雲과 가장 비슷한 실제 풍경이 될 것이다.
이런 구름을 기다린다면 넓은 하늘과 후지산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가와구치호 주변이나,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전망지가 좋을 것 같다.
후지산만 잘 보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까지 예쁘게 걸려줘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구름 하나가 후지산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렸다가 다시 열어주는 것을 보았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풍경은 계속 달라졌다.
그 위에 가느다란 絹雲까지 걸린다면 같은 후지산이 또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이쯤 되면 관광이라기보다 기다림에 가깝다.
4.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 ― 구름바다 위에 솟은 후지산
2026년 네 번째이자 후지운케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雲海.
우리말로도 그대로 운해다.
산 아래에 구름이 넓게 깔리면서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 구름바다 위로 후지산이 우뚝 솟는다.
후지운케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
플래티넘은 2023년 鱗雲에서 시작해 霞, 絹雲을 거쳐 2026년 이 雲海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이 녀석이 표현한 실제 풍경을 보는 것은 네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쉽지 않을 것 같다.
운해는 날짜를 정해놓고 찾아간다고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밤사이 지표면이 식고, 습한 공기가 낮은 곳에 머물면서 기온역전이 생기고, 그 위 높은 곳은 맑아야 한다.
전날 비가 내린 뒤 다음 날 아침 맑아지는 날도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계절로 보면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커지기 쉬운 봄이나 가을의 이른 아침을 노려볼 만하다.
장소는 호숫가보다 어느 정도 고도를 확보한 곳이 유리하다.
신도고개(新道峠)의 FUJIYAMA 트윈테라스처럼 높은 곳에서 후지산과 가와구치호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지도 후보가 될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일 뿐이다.
결국 자연이 허락해야 한다.
숙소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높은 전망대로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어느 날 운 좋게 산 아래로 끝없는 구름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후지산이 떠 있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본 것은 후지산 주변을 떠다니는 구름이었다.
그 구름 하나만으로도 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산 아래를 통째로 구름이 뒤덮고 그 위로 후지산 정상만 솟아 있는 풍경이라면 어떨까.
사진으로 보는 것과 그 자리에 직접 서 있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래서 네 풍경 가운데서도 雲海는 꼭 한번 직접 보고 싶다.
5. 구름 네 자루를 실제 풍경으로 만난다면
鱗雲, 霞, 絹雲, 雲海.
이 네 자루는 실제 풍경으로 만나기가 만년필을 보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구름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우로코구모(鱗雲, うろこぐも, Urokogumo)는 가을 하늘을 노려야 한다.
카스미(霞, かすみ, Kasumi)는 봄날 먼 산이 부드럽게 흐려지는 시기가 잘 어울린다.
키누구모(絹雲, きぬぐも, Kinugumo)는 계절보다 그날 높은 하늘에 권운이 떠주는지가 중요하다.
운카이(雲海, うんかい, Unkai)는 봄이나 가을의 새벽, 습도와 기온역전 같은 조건까지 맞아야 가능성이 높아진다.
계절이 맞아야 하고,
시간이 맞아야 하고,
기온이 맞아야 하고,
습도가 맞아야 하고,
구름이 원하는 모양으로 떠줘야 한다.
거기에 후지산까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한 가지라도 틀어지면 만년필 속 풍경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리즈를 실제 여행으로 따라가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이번에는 鱗雲을 만나러 간다.”
“이번에는 霞를 보러 간다.”
“오늘은 絹雲이 뜰까.”
“이번 여행에서는 雲海를 한번 기다려보자.”
후지산 하나를 앞에 두고도 여행 목적이 전부 달라진다.
6. 플래티넘은 어디까지 후지산을 우려먹을 셈인가
후지운케이 네 자루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 회사는 대체 후지산에서 어디까지 소재를 찾아낼 셈인가.’
이번에는 구름이었다.
비늘처럼 펼쳐진 구름을 찾아내고,
봄날의 흐릿한 안개를 찾아내고,
비단실 같은 권운을 찾아내고,
마지막에는 구름바다까지 끌어왔다.
구름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모양도 계속 변하는데, 그 짧은 순간을 골라 이름을 붙이고 만년필 한 자루의 색과 무늬로 만들어냈다.
이쯤 되면 후지산을 모티프로 만년필을 만든다기보다 후지산 주변에서 만년필 만들 구실을 계속 찾아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예쁘다.
그러니 수집가가 당한다.
욕은 그렇게 해놓고 신제품 사진이 뜨면 또 확대해서 보는 내 손가락도 문제다.
결국 회사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7. 내 책상 위에 모두 있었다면
가끔 상상해본다.
후지산을 소재로 만들어진 #3776들이 책상 위에 한 줄로 쫙 늘어서 있는 모습.
내가 가지고 있는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그리고 그 옆으로 내가 놓친 만년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本栖의 투명한 계보를 이어받은 忍野까지 한 자루 세워놓으면 제법 장관이었을 것이다.
전부 #3776.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산은 하나다.
후지산.
책상 위에 작은 후지산 세계 하나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물론 현실의 책상 위에는 그렇게 완성된 모습이 없다.
놓친 녀석들이 있다.
한정판이라는 것은 지나간 뒤에 더 아쉽다.
그때는 ‘다음에 사지 뭐’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다음이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 그 아쉬움만 들여다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만년필이 없으면 풍경을 만나러 가면 된다.
8. 구름은 다시 온다
만년필은 한정판이다.
정해진 수량을 만들고 판매가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구름은 다르다.
鱗雲은 어느 가을날 다시 후지산 위에 펼쳐질 것이다.
霞도 어느 봄날 후지산의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絹雲도 어느 맑은 날 높은 하늘을 비단실처럼 흘러갈 것이고,
雲海도 어느 새벽 산 아래를 구름바다로 뒤덮을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나타나준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그것이 오히려 재미있다.
실제 후지산으로 가면 된다.
가을에는 가와구치호 주변에서 비늘구름을 기다리고,
봄에는 霞 속에 흐릿하게 떠 있는 후지산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이 열린 날에는 絹雲이 흐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운해를 노리는 날에는 높은 전망지에서 새벽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한 번 간다고 보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두 번 가도 못 볼 수 있다.
그러면 또 가면 된다.
그것도 여행이다.
9. 만년필 하나가 또 여행을 만든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 나는 처음 후지산을 만났다.
신칸센 창밖으로 후지산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렇게 흥분했고,
시라이토 폭포에서는 무지개를 보았고,
타누키호에서는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후지산은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책상 위의 만년필을 다시 꺼내게 했고,
오래전에 보았던 한정판들을 다시 찾아보게 했고,
이번에는 그 만년필들이 담고 있는 구름까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후지산을 소재로 한 #3776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으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하지만 이제 그 아쉬움만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후지오호 다섯 자루는 언젠가 직접 들고 가면 된다.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에서는 本栖를 들고,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에서는 精進을 들고,
사이호(西湖, さいこ)에서는 西를 들고,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에서는 山中을 들고,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에서는 河口를 들고 사진을 한 장씩 찍는다.
그리고 또 다른 날에는 하늘을 기다려본다.
가을 하늘에 鱗雲이 펼쳐질 수도 있고,
봄날 霞 속에서 후지산의 윤곽이 희미해질 수도 있다.
푸른 하늘에 絹雲이 걸릴 수도 있고,
정말 운이 좋다면 어느 새벽 雲海 위로 솟은 후지산을 만날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어떤 후지산을 만나게 될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다음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못 산 만년필은 여전히 아쉽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하늘의 구름은 흘러가지만 플래티넘은 그 순간을 만년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그 만년필들은 다시 나를 후지산으로 가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만년필 한 자루가 만들어내는 여행도 참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