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2]
후지산의 계절을 만년필에 담다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슌케이 다섯 자루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의 첫 자루를 사고 난 뒤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리즈라는 것이 그렇다.
하나만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두 자루가 되고 세 자루가 되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자꾸 눈에 밟힌다.
“시리즈는 모아야 맛이지.”
결국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까지 다섯 자루를 모두 모았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플래티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2016년 후지오호 시리즈를 끝내자 이듬해부터는 후지산이 계절마다 보여주는 풍경을 새로운 만년필에 담기 시작했다.
후지슌케이(富士旬景, ふじしゅんけい, Fuji Shunkei) 시리즈.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다시 다섯 자루였다.
슌교(春暁, しゅんぎょう, Shungyo)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
롯카(六花, ろっか, Rokka)
시운(紫雲, しうん, Shiun)
킨슈(錦秋, きんしゅう, Kinshu)
참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회사다.
플래티넘은 이 시리즈를 후지산이 만들어내는 계절의 풍경과 아름다운 일본어를 만년필 전체에 표현하려는 기획으로 만들었다.
나라고 이 녀석들을 책상 위에 다섯 자루 나란히 올려놓고 싶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갖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돈이다.
이놈의 돈.
만년필 한 자루 살 때는 그럭저럭인데, 한정판 시리즈가 해마다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벌이는 시원찮고 만년필에 들어가는 돈은 끝이 없다.
그래서 후지슌케이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망설였다.
살까.
말까.
또 봤다.
장바구니에 넣어놓고도 결제를 못 했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었다.
플래티넘 한정판 몇 자루를 놓고는 비싸다고 고민하던 내가, 그 무렵에는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몽블랑이었다.
어린왕자 르그랑 한정판이 눈에 들어오고,
「80일간의 세계일주」 르그랑 한정판이 또 눈에 들어오고,
145 두에와 145 레진, 솔리테어 르그랑에 이어 작가 오마주 시리즈까지 하나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플래티넘을 보면서는
‘아이고, 이것까지 사면 돈이 또 얼마나 깨지는 겨.’
하고 망설이던 사람이,
몇 배나 더 비싼 몽블랑 앞에서는 또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가격을 보고,
사진을 확대해 보고,
다른 사람의 실물 사진까지 찾아보고,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하다.
플래티넘은 돈이 아까워 참으면서 그보다 몇 배 비싼 몽블랑은 하나둘 모셔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몽블랑을 산 것이 후회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도 책상 위에 어린왕자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꺼내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뿌듯하다.
문제는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쪽을 얻으면 다른 한쪽을 놓친 것이 또 아쉽다.
결국 후지슌케이 다섯 자루는 사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많이 들여다봤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만년필을 하나씩 사들이면 택배가 온다.
한 번 오고,
또 오고,
며칠 있다 또 온다.
그러면 아무리 내 취미라 해도 마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마님이 착하다.
내가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니 만년필 사는 것 정도는 그냥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 같다.
말은 안 해도 그런 것 같다.
마님 하나는 잘 모시고 온 셈이다.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는 참아야 했다.
그렇게 후지슌케이는 결국 화면 속 만년필로만 남았다.
문제는 한정판이라는 것이다.
그때 안 사면 나중에는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당시에는
‘다음에 사지 뭐.’
했는데 그 ‘다음’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돈이 생겼을 때는 물건이 없고,
어쩌다 물건이 나오면 상태나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하나씩 사둘 걸 하는 미련이 남는다.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옆에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까지 쫙 늘어서 있었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시리즈는 역시 모아야 맛이다.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만년필만 붙들고 아쉬워할 수는 없다.
만년필은 놓쳤어도 그 만년필들이 담아낸 후지산의 계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진다.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
이 다섯 풍경을 실제 후지산에서 만나려면 언제 가야 할까.
1. 슌교(春暁, しゅんぎょう, Shungyo) ― 봄날 새벽의 후지산
2017년 첫 번째 작품.
春暁는 ‘봄날의 새벽’을 뜻한다.
겨울의 추위가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이른 봄 새벽, 햇빛이 퍼지면서 붉게 물드는 하늘과 검은 실루엣처럼 서 있는 후지산을 표현했다.
붉은 몸체와 불규칙한 가는 선, 무광 가공으로 새벽 하늘을 표현했고 캡 꼭대기에는 후지산을 형상화한 부분도 넣었다.
세계 3,776자루 한정.
후지산의 높이 3,776m와 정확히 맞춘 숫자다.
이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다면 언제 가야 할까.
이름부터 春暁다.
봄날 새벽.
따라서 3월에서 4월 무렵, 해가 뜨기 전부터 후지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벽이다.
해가 높이 뜬 뒤가 아니라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고 후지산은 아직 검은 실루엣으로 남아 있는 짧은 시간.
그 순간을 만나야 슌교의 풍경에 가까워진다.
이번 여행에서는 겨울 아침의 후지산을 처음 만났지만, 언젠가는 봄날 새벽에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후지산도 한번 보고 싶다.
검은 산의 윤곽 뒤로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풍경을 실제로 보고 나면 春暁라는 이름도 지금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2.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 ― 신록 사이로 부는 초여름 바람
2018년 두 번째 작품.
薫風은 초여름 신록 사이로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을 뜻한다.
플래티넘은 햇빛을 받은 신록과 푸른 하늘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반투명한 터키석빛 몸체에 담았다.
신록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풍경이 이 만년필의 모티프다.
이걸 실제로 보려면 초여름이다.
대략 5월 하순에서 6월 무렵.
눈 녹은 후지산 기슭의 나무들이 연두색에서 짙은 초록으로 바뀌고, 파란 하늘 아래 신록이 가장 싱싱할 때다.
다만 여름으로 갈수록 후지산은 구름에 가릴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이 풍경을 만나려면 아침 일찍 후지산 앞에 서는 편이 낫다.
산 아래 신록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뒤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내준다면, 만년필 속 薫風이 실제 풍경이 되는 셈이다.
겨울의 흰 후지산을 먼저 본 나로서는 초록빛으로 가득한 계절의 후지산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다.
같은 산인데 주변의 색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3. 롯카(六花, ろっか, Rokka) ― 눈과 얼음의 후지산
2019년 세 번째 작품.
六花.
글자 그대로 보면 ‘여섯 개의 꽃’이다.
하지만 여기서 꽃은 눈 결정이다.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눈 결정을 꽃에 비유한 옛 표현이다.
플래티넘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후지산의 깨끗한 풍경을 이 만년필에 담았다.
몸체에도 눈 결정이 이어지는 듯한 정밀한 가공을 넣었다.
빛을 받으면 여러 면에서 반사되며 눈 결정처럼 반짝인다.
이 풍경은 비교적 명확하다.
겨울이다.
12월부터 2월.
눈을 뒤집어쓴 후지산을 볼 가능성이 높고, 공기가 건조해 산의 윤곽도 선명하게 보이는 시기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후지산도 12월 27일의 겨울 후지산이었다.
신칸센 창밖에서 처음 만났고,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 타누키호에 이르기까지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직접 만난 후지산은 후지슌케이 다섯 풍경 가운데 六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는 六花 만년필이 없었지만, 그 만년필이 표현하려 했던 겨울의 후지산은 내 눈으로 직접 본 셈이다.
4. 시운(紫雲, しうん, Shiun) ― 보랏빛 구름에 감싸인 후지산
2020년 네 번째 작품.
紫雲.
보랏빛 구름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진 구름이기도 하다.
플래티넘은 후지산 주변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구름과 그 사이로 비치는 빛을 정밀한 렌즈컷으로 표현했다.
세계 3,776자루 한정이었다.
이 녀석이 표현한 실제 풍경을 찾아가는 것은 조금 어렵다.
春暁처럼 ‘봄에 가면 된다’, 六花처럼 ‘겨울에 가면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랏빛 구름은 계절보다 빛과 구름의 조건이 중요하다.
해가 뜨기 직전이나 해가 진 직후, 낮은 각도의 햇빛이 구름을 붉고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순간을 만나야 한다.
맑기만 해서도 안 된다.
후지산은 보여야 하지만 그 주변에는 빛을 받을 적당한 구름도 있어야 한다.
결국 이 풍경은 기다려야 한다.
운도 따라줘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후지산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구름 하나가 후지산의 표정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느꼈다.
그 구름이 어느 저녁 보랏빛으로 물들기까지 한다면 또 얼마나 다른 후지산이 될까.
어쩌면 다섯 풍경 가운데 가장 만나기 어려워서 더 보고 싶은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5. 킨슈(錦秋, きんしゅう, Kinshu) ― 단풍으로 물든 후지산의 가을
2021년 마지막 작품.
錦秋.
‘비단 같은 가을’이라는 뜻이다.
산과 들이 단풍으로 붉고 노랗게 물든 모습을 금실과 은실로 짠 비단인 錦에 비유한 이름이다.
플래티넘은 불타는 듯한 가을 단풍을 붉은 몸체와 정밀한 커팅으로 표현했다.
후지슌케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 풍경을 만나려면 당연히 가을이다.
후지오호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10월 하순부터 11월 무렵이 좋다.
특히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일대처럼 단풍과 호수, 후지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가을빛을 기다려보고 싶다.
붉은 단풍 아래 호수.
그 뒤로 솟은 후지산.
정상에는 흰 눈.
겨울 타누키호에서 보았던 후지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春暁가 하루의 시작을 담았다면 錦秋는 한 해의 깊어진 계절을 담은 듯하다.
언젠가 실제로 한번 보고 싶은 풍경이다.
6. 다섯 자루의 만년필을 실제 풍경으로 만난다면
春暁, 薫風, 六花, 紫雲, 錦秋.
만년필은 다섯 자루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후지산이다.
계절과 시간, 빛이 달라졌을 뿐이다.
春暁를 만나려면 봄날 새벽에 가야 한다.
薫風을 만나려면 신록이 가장 싱싱한 초여름의 아침이 좋다.
六花를 만나려면 눈 덮인 겨울의 후지산을 찾아가야 한다.
紫雲은 계절보다 일출이나 일몰 무렵의 빛과 구름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錦秋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이 제격이다.
후지오호 시리즈와는 여기서 차이가 난다.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이호(西湖, さいこ),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는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호수는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후지슌케이는 그렇지 않다.
계절이 맞아야 하고,
시간이 맞아야 하고,
빛이 맞아야 한다.
그날 후지산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니 만년필에서 모티프를 얻은 바로 그 풍경을 직접 만나려면 한 번의 여행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
봄에는 春暁.
초여름에는 薫風.
겨울에는 六花.
어느 날의 일출이나 일몰에는 紫雲.
가을에는 錦秋.
같은 후지산을 보러 가는데도 여행의 목적과 풍경이 전혀 달라진다.
이쯤 되면 단순히 ‘후지산을 보러 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떤 후지산을 만나러 가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7. 만년필은 놓쳤어도 풍경까지 놓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아직 남은 것이 있다.
만년필은 놓쳤지만 그 만년필이 담았던 실제 후지산의 풍경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봄날 새벽의 春暁.
초여름 신록의 薫風.
눈 덮인 六花.
보랏빛 구름의 紫雲.
가을 단풍의 錦秋.
그 풍경들은 지금도 후지산 어딘가에서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다시 나타난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가운데 겨울의 六花에 가까운 후지산을 만났다.
다음에는 다른 얼굴의 후지산을 만나러 가도 좋겠다.
“이번에는 春暁를 만나러 간다.”
“이번에는 錦秋의 후지산을 보러 간다.”
그렇게 하나의 만년필 이름을 여행의 목적처럼 정해놓고 떠나는 것이다.
언제 다시 후지산으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단순히 후지산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절의 후지산을 만나러 가는지부터 정해보고 싶다.
봄날 새벽의 붉은 하늘일 수도 있고,
초여름 신록일 수도 있고,
가을 단풍 너머의 흰 후지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후지오호 다섯 자루를 들고 실제 다섯 호수를 하나씩 찾아가는 여행까지 한다면 더 좋겠다.
만년필은 책상 위에만 있는 물건이지만, 그 만년필 하나 때문에 알게 된 이름이 실제 여행지가 되고, 그 속에 담긴 색과 무늬 때문에 어느 계절의 풍경을 찾아가게 된다.
다음에는 어떤 후지산을 만나게 될까.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플래티넘이 만들어놓은 것은 만년필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한테는 아직 가보지 않은 여행지가 또 이렇게 생겨버렸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