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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 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
  • 두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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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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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여행 4일차, 2025.12.27.(토요일)
구름 사이 후지산과 물의 고향 시라이토 폭포로


1. 새벽 5시, 결국 마님과 둘이 떠나다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직 밖은 깜깜했다.

어젯밤 자연을 보고 싶다던 아들에게 후지노미야에 가자고 했더니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느냐고 물었다.

“5시에는 일어나야 헐틴디.”

그 한마디에 아들은 바로 포기했다.

“못 일어납니다.
차라리 호텔에서 하루 종일 게임할랍니다.”

딸래미는 일본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고, 결국 오늘 후지산을 보러 가는 사람은 마님과 나 둘뿐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새벽의 시부야 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보았던 모습과 또 달랐다.

밤마다 사람으로 넘쳐나던 시부야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조용하다.
오전 5시 20분경 시부야역(渋谷駅)에 도착해 JR을 타고 도쿄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도쿄를 벗어난다.
목적지는 후지산 기슭의 후지노미야(富士宮)다.


2. 새벽의 도쿄역, 고다마를 기다리며

오전 6시가 조금 넘어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카이도·산요 신칸센(東海道・山陽新幹線)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전광판에는 이른 아침부터 열차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노조미(のぞみ), 히카리(ひかり), 고다마(こだま).

이름도 일본답다.

노조미(のぞみ)는 ‘희망·바람’,
히카리(ひかり)는 ‘빛’,
고다마(こだま)는 ‘메아리’라는 뜻이다.

도카이도 신칸센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역할도 서로 다르다.
노조미는 도쿄·나고야·교토·신오사카 등 주요 도시를 빠르게 연결하는 최속달 열차이고, 히카리는 노조미보다 정차역이 많으며, 고다마는 도카이도 신칸센의 모든 역에 정차한다.

우리가 탈 열차는 오전 6시 30분 출발 고다마 701호(こだま701号).

도쿄에서 나고야 방향으로 내려가는 도카이도 신칸센이다.

오늘 목적지인 신후지역(新富士駅)은 노조미가 서지 않는다.
우리는 신후지에 정차하는 고다마를 타고 간다.

열차에 오르기 전 아침거리도 준비했다.

샌드위치와 부드러운 카츠샌드.
그리고 플랫폼에서 따뜻한 커피도 샀다.

한겨울 이른 아침의 신칸센 플랫폼.
손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열차를 기다리니 이제야 조금씩 잠이 깨는 것 같았다.


3. 오전 6시 30분, 고다마 701호 출발

오전 6시 30분.

고다마 701호가 도쿄역을 출발했다.

역시 신칸센이다.

도쿄를 벗어나자 열차는 말 그대로 쌩쌩 달렸다.

마님과 나란히 앉아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카츠샌드로 아침을 먹고 따뜻한 커피도 마셨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였지만 창밖 풍경이 도시에서 산과 들로 바뀌기 시작하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다.

일본을 여러 번 여행했지만 지금까지 후지산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진으로는 수도 없이 봤다.
일본을 상징하는 산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후지산을 소재로 한 물건도 좋아했다.

일본 플래티넘(PLATINUM)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 만년필(万年筆)도 모았다.
후지산 주변의 다섯 호수를 하나씩 표현한 모토스(本栖), 쇼지(精進), 사이(西), 야마나카(山中), 가와구치(河口) 시리즈다.

‘#3776’이라는 이름부터 후지산의 높이 3,776m에서 따온 만년필이다.

그리고, 후지산과의 인연은 한번 엇갈린 적도 있었다.

재작년쯤 후지산을 등반하려고 하나투어 패키지여행까지 예약했었다.

이제 후지산을 보겠구나 했는데 출발을 앞두고 일이 생겼다.

마님이 사무실 체육행사로 대둔산에 갔다가 다리를 삐어서 돌아온 것이다.

결국 여행을 취소했다.

마님은 부상 때문에 취소수수료 없이 취소가 됐는데, 멀쩡했던 나는 위약금을 물고 취소해야 했다.

ㅠㅠㅠ.

그렇게 한번 만나려다 실패했던 후지산이다.

후지산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작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한번은 여행까지 예약했다가 가지 못했던 그 후지산을 오늘 드디어 만나러 간다.


4. “후지산이다!”

신후지역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자꾸 창밖을 살폈다.

오늘 처음 만나게 될 후지산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열차 진행 방향 오른쪽 차창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지산(富士山).

처음에는 구름에 가려 산허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구름 위로 정상 부분만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어? 저거 후지산 아녀?”

마님과 나 둘 다 창밖으로 시선이 꽂혔다.

열차가 조금 더 달리자 구름 사이가 열리면서 눈을 뒤집어쓴 정상부가 점점 선명해졌다.

워매.

후지산이다.

일본을 여러 번 다니면서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고, 한번은 여행까지 예약했다가 가지 못했던 후지산을 드디어 처음 만났다.

순간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카메라를 들고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던 후지산은 어느 순간 눈 덮인 정상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사진으로 수없이 봐왔던 바로 그 모습이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거대한 원뿔형 산.
그 아래는 구름에 잠겨 있고 정상만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책과 사진으로 보고, 만년필로까지 모았던 후지산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길 잘했다.

아들아.
니가 이걸 놓쳤다.


5. 오전 7시 34분, 신후지역에 내리다

오전 7시 34분경 신후지역(新富士駅)에 도착했다.

고다마에서 내려 플랫폼을 걸으며 다시 후지산을 바라봤다.
역에서도 구름 사이로 눈 덮인 정상이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후지노미야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후지역은 도카이도 신칸센 역이고, 우리가 타야 할 미노부선(身延線)은 후지역(富士駅)에서 출발한다.
두 역은 철도로 직접 이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택시를 탔다.

오전 7시 38분경 신후지역에서 택시를 타고 후지역으로 이동했다.

택시 창밖으로도 후지산이 계속 따라왔다.
도시 어디에서 고개를 돌려도 저 거대한 산이 배경처럼 서 있는 풍경이 신기했다.


6. 신칸센에서 로컬열차로

후지역 남쪽 출구(富士駅南口)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JR 미노부선(身延線)을 타야 한다.

전광판에는 우리가 탈 열차가 정확하게 표시돼 있었다.

08:06.
보통(普通).
니시후지노미야(西富士宮)행.
2번 승강장.

두 량짜리 작은 로컬열차였다.

조금 전까지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신칸센을 타고 왔는데 이제는 동네를 천천히 이어가는 작은 전철이다.

오전 8시 6분 열차가 후지역을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후지산 주변의 주택과 들판이 지나갔다.
도쿄에서 보던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들이 그렇게 보고 싶다던 ‘자연’이 이제야 나타났다.

정작 그 녀석은 호텔에서 닌텐도를 하고 있겠지만.


7. 오전 8시 25분, 후지노미야에 도착하다

오전 8시 25분경 후지노미야역(富士宮駅)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라이토 폭포(白糸の滝)로 가는 버스가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한다.

환승시간은 불과 5분.

열차에서 내려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오전 8시 30분.
후지노미야역을 출발했다.

신칸센에서 택시로, 택시에서 미노부선으로, 다시 버스로.

도쿄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교통수단을 몇 번이나 갈아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연결이 신기할 정도로 딱딱 맞았다.


8. 후지산본궁센겐타이샤를 지나 산 아래로

버스가 후지노미야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곧 창밖으로 커다란 붉은 도리이가 나타났다.

후지산본궁센겐타이샤(富士山本宮浅間大社).

오늘은 버스에서 바라보며 그대로 지나갔지만 그냥 후지노미야에 있는 큰 신사 하나는 아니다.

후지산 자체를 신성한 산으로 숭배해온 일본의 후지산 신앙과 깊이 연결된 곳으로, 전국에 1,300여 곳이 있다는 센겐신사(浅間神社)의 총본궁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주제신은 고노하나노사쿠야히메노미코토(木花之佐久夜毘売命).
별칭으로 센겐다이진(浅間大神)이라 불리며 후지산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후지산은 지금 우리 눈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산이자 관광지로 먼저 보이지만, 옛사람들에게는 언제 다시 불을 뿜을지 모르는 거대한 화산이었다.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신이 머무는 신성한 산이었다.

후지산본궁센겐타이샤의 기원 역시 후지산의 분화를 진정시키고 산의 신을 모시는 신앙과 연결되어 전해진다.
후지산 신앙이 널리 퍼지면서 이곳 역시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주요 사전 가운데 본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호 아래 1604년에 조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후지산과 이 신사의 관계는 산 아래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후지산 정상부의 8부 능선 이상에는 후지산본궁센겐타이샤의 경내지로 여겨지는 구역이 있으며, 정상의 분화구 자체도 신성한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말하자면 후지노미야 시내에 있는 이 신사와 멀리 솟아 있는 후지산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장소가 아니라, 오랜 후지산 신앙 속에서는 하나로 이어진 공간인 셈이다.

2013년 후지산이 ‘후지산-신앙의 대상과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 때 후지산본궁센겐타이샤도 그 가치를 이루는 구성자산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향하는 시라이토 폭포도 같은 후지산 세계문화유산의 구성자산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단순히 폭포 하나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후지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공간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시간 때문에 버스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커다란 붉은 도리이가 뒤로 멀어졌다.

도심을 벗어날수록 주택은 줄어들고 들판과 산이 가까워졌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후지산은 구름에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조금씩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도쿄의 고층빌딩과 전철역을 돌아다니다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일본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9. 오전 9시, 시라이토 폭포

오전 9시경.

버스가 시라이토노타키(白糸の滝)에 도착했다.

도로 표지판에는 일본어와 영어뿐 아니라 한글로도

‘시라이토노타키’ 라고 적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폭포 쪽으로 걸었다.

안내판을 따라 숲길로 접어들자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시라이토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전체에서 수십, 수백 갈래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하얀 실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라이토(白糸).

말 그대로 ‘흰 실’이다.

이름을 참 잘 지었다.


10. 땅속에서 솟아나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

시라이토 폭포가 신기했던 것은 단순히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물줄기가 위쪽 강에서 한꺼번에 넘어오는 것이 아니라 절벽의 지층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후지산에 내린 비와 눈이 화산지층 속으로 스며든 뒤 오랜 시간 지하를 흐르다가 이곳에서 용출하면서 폭포를 만든다.

절벽의 검은 화산암 사이에서 물이 끊임없이 배어 나와 가느다란 흰 실처럼 떨어졌다.

폭 약 150m에 걸쳐 수많은 물줄기가 이어지는 모습은 다른 폭포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숲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폭포가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가느다란 실 같던 물줄기들이 가까이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이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11. 시라이토 폭포에 뜬 무지개

폭포 아래로 내려섰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정말 멋졌다.

왼쪽에서는 굵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지고, 오른쪽 절벽 전체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검은 화산암과 초록빛 이끼 사이로 하얀 물줄기가 이어졌고, 그 아래로 맑은 물이 흘렀다.

그리고 햇빛이 폭포의 물보라에 닿는 순간 희미하게 무지개가 나타났다.

“여보, 저기 무지개.”

폭포 한가운데 작은 무지개가 걸렸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
파란 하늘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
검은 절벽을 따라 수없이 흘러내리는 하얀 물줄기.
그리고 그 위에 잠시 나타난 무지개.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여기까지 온 보상을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었다.


12. 마님과 둘이 맞은 멋진 아침, 그리고 타누키호로

폭포를 배경으로 마님과 사진을 찍었다.

둘이 셀카도 찍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천천히 폭포 주변을 걸었다.

어제까지는 네 식구가 도쿄의 사람들 틈에 섞여 바쁘게 돌아다녔다.

오늘은 마님과 둘뿐이다.

딸래미는 일본 친구를 만나고 있고, 자연을 보고 싶다던 아들은 호텔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결국 마님과 내가 둘이서 후지산 아래까지 왔다.

신칸센 차창에서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후지산을 처음 보고 흥분했고, 시라이토 폭포에서는 절벽을 따라 흰 실처럼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무지개까지 만났다.

새벽 5시에 일어난 보람이 있었다.

마님과 둘이 맞은 후지산 아래의 아침은 참 좋았다.

폭포를 충분히 둘러본 뒤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시라이토 폭포가 내려다보였고, 다리를 건너며 아래로 흐르는 물을 바라봤다.

이 물길은 시바가와(芝川).

후지산에서 흘러나온 물을 품고 흐르는 강이다.

하늘에는 새 떼가 무리를 지어 날아다녔다.

폭포 입구 쪽으로 돌아와 버스 시간표를 다시 확인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타누키호(田貫湖).

시라이토 폭포에서 조금 더 후지산 쪽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호수다.

정류장에는 타누키호와 휴가촌 후지(休暇村富士) 방면으로 이어지는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렌터카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는 날이다.

신칸센을 타고,
택시를 타고,
미노부선 로컬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시라이토 폭포까지 왔다.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후지산 아래의 호수로 들어간다.

타누키호.

그보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모토스호(本栖湖)도 있다.

플래티넘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 만년필 가운데 하나인 ‘모토스(本栖)’의 바로 그 호수다.

만년필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이름이라 실제 모토스호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타누키호에서 조금 더 가서 모토스호까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돌아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일정이 맞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포기했다.

만년필 속 모토스호는 가지고 있지만 실제 모토스호는 다음 여행으로 남겨두었다.

버스가 올 시간이 가까워졌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다 타누키호 방면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시라이토 폭포가 뒤로 멀어졌다.

이제 다음은 타누키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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