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여행 4일차, 2026.05.25.(월요일)
드디어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넘다-1편
1. 일본에 온 뒤 매일 확인했던 무로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날이 밝았다.
오늘은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이다.
사실 일본에 도착한 뒤부터 나는 매일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홈페이지에 들어가 무로도 라이브카메라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떨까.
어떤 날은 파란 하늘 아래 설산이 기가 막히게 보였고, 어떤 날은 안개와 구름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가 가는 날만큼은 제발 맑아라.”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 새벽에도 눈을 뜨자마자 라이브카메라부터 확인했다.
오전 4시 12분.
화면에 나타난 해발 2,450m 무로도는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이었다.
눈 덮인 산 너머로 하늘이 주황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했고, 어둠이 조금씩 걷히면서 산의 능선과 골짜기에 남아 있는 눈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로도 고원은 아직 온통 눈이었다.
5월 25일인데도 넓은 설원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나이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무로도만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알펜루트를 따라 다이칸보, 미다가하라, 구로베다이라, 구로베댐의 라이브카메라까지 차례로 확인했다.
해발 2,316m 다이칸보에는 산허리를 따라 구름이 조금 걸려 있었지만 그 위로 설산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발 1,930m 미다가하라에는 넓은 설원이 펼쳐져 있었고 시야도 좋았다.
구로베다이라에서도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면마다 찍힌 시간은 오전 4시 12분에서 13분.
불과 몇 시간 뒤면 우리가 직접 저곳들을 지나가게 된다.
오늘은 되겠다.
일본에 온 뒤 며칠 동안 매일 라이브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날씨 때문에 마음을 졸였는데, 정작 우리가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 아침에는 하늘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어제 쿠로베 협곡에서는 비가 내리고 산허리에 구름이 걸렸다.
나는 원래 비가 지나간 뒤 구름과 안개가 산을 감싸는 풍경을 좋아해서 어제는 그런 날씨가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다테야마의 새하얀 설산과 유키노오타니를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만큼은 파란 하늘과 눈부신 설산을 보고 싶었다.
어제는 비와 구름이어서 좋았고,
오늘은 맑아서 좋다.
우리는 운이 좋은가 보다.
오늘은 쨍해야 하는 날이었다.
2. 새벽 4시 40분, 벌써 환한 도야마의 거리
오전 4시 40분경 호텔을 나섰다.
우리가 탈 열차는 덴테츠도야마역에서 오전 5시 10분에 출발하는 다테야마행 특별쾌속열차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거리의 밝기였다.
“야, 이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 환해?”
새벽 4시 40분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밝았다.
대낮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보다 동쪽에 있는 일본이라 해가 일찍 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새벽 거리에 나와 보니 실감이 났다.
아직 사람도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 도야마의 거리를 마님과 걸었다.
어제 비가 내리던 도야마와는 완전히 다른 아침이었다.
하늘은 밝아지고 있었고 오늘 하루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점점 커졌다.
오늘은 알펜루트를 횡단하는 날이다.
발걸음부터 달랐다.
3. 새벽부터 엄청난 줄, 덴테츠도야마역
오전 4시 50분경 덴테츠도야마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 안으로 들어가자 깜짝 놀랐다.
“우와, 이 시간에 사람이 이렇게 많어?”
새벽 5시도 되지 않았는데 역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매표소와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배낭을 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우리처럼 다테야마와 알펜루트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표를 미리 구입해 놓았기 때문에 매표소 앞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바로 승차를 기다리는 줄에 합류했다.
전광판에는 오전 5시 10분 다테야마행 열차가 표시되어 있었다.
‘특별쾌속 다테야마.’
성인 1,000엔의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열차였다.
일반열차보다 돈을 더 내는 대신 다테야마까지 단숨에 달려가는 열차다.
드디어 승강장으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부터 몰려든 사람들을 보니 오늘 알펜루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벌써 짐작이 갔다.
그래도 마님과 나는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앉아서 가야지.
오늘은 이제 시작이다.
4. 1,000엔 더 내고 다테야마로 단숨에
오전 5시 10분.
특별쾌속열차가 덴테츠도야마역을 출발했다.
무려 1,000엔이나 더 냈다.
그러니 제대로 달려줘야 한다.
어제 우나즈키온센으로 향하면서 지나갔던 철길을 오늘 다시 달렸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어제는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산에는 구름이 걸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햇빛이 쏟아졌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판과 논, 작은 마을들이 아침 햇살을 받았고 멀리에는 다시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보았던 설산인데 오늘 다시 보아도 좋았다.
열차는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어제도 지나갔던 데라다역이 가까워졌다.
데라다역은 우나즈키온센으로 향하는 노선과 다테야마로 향하는 노선이 갈라지는 역이다.
어제는 이곳에서 우나즈키온센 방향 선로를 따라갔고, 오늘은 다테야마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우리가 탄 열차는 특별쾌속이다.
데라다역에는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어제는 쿠로베 협곡으로,
오늘은 다테야마로.
같은 데라다역을 지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5. 이런 역도 남겨둔다고?
도야마 시가지를 벗어나면서 창밖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논과 밭이 나타나고 작은 마을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갈수록 아주 작은 역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런 역들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일본은 참 대단혀.”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용객이 적다는 이유로 진작 폐역시켜 버렸을 것 같은 역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곳은 정말 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특히 오래된 역사는 눈길을 끌었다.
벽은 양철이나 골함석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이 벌겋게 녹슬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없애지 않았다.
열차는 여전히 그곳을 지나고 필요하면 사람을 태우고 내려준다.
특히 아리미네구치역(有峰口駅·ありみねぐちえき) 같은 작은 역도 그렇게 철길 옆에 남아 있었다.
번듯하고 새것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작은 것들도 제자리에서 계속 역할을 하게 하는 모습.
나는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일본 철도여행이 재미있다.
무조건 허물고 새로 짓는 대신, 구조적 기능만 유지된다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제 역할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 일본 철도 인프라가 가진 뚜렷한 특징이지 싶다.
그리고, 화려함보다는 실용성과 보존을 택하는 방식이 험준한 산악 철도 시스템에도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았다.
6. 첩첩산중(疊疊山中), 심산유곡(深山幽谷) 속으로
데라다역을 지나 다테야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풍경은 완전히 산악지대로 바뀌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심산유곡(深山幽谷)
딱 그 말이 어울렸다.
산은 점점 높아졌고 철길 옆으로 깊은 계곡이 따라붙었다.
아침 햇빛을 받은 산은 온통 짙은 초록빛이었다.
그 사이로 계곡물이 흘렀다.
열차는 산과 산 사이를 파고들듯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계곡에는 작은 보와 사방댐 같은 구조물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물은 층층이 떨어지며 아래쪽으로 흘러갔다.
산비탈을 따라 난 도로와 터널도 보였다.
우리가 탄 열차가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눈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멀리 왼쪽으로 다테야마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다.
어제 쿠로베 협곡에 이어 오늘은 다테야마다.
이제 정말 입산이다.
다테야마는 한자로 立山.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입산’이다.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갈 때도 입산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 이제 진짜 입산하는 겨.”
그리고 이곳부터 진짜 알펜루트가 시작된다.
7. 오전 6시, 입산역에 도착하다
오전 6시경 다테야마역에 도착했다.
아니, 오늘만큼은 ‘입산역’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테야마역(立山駅). 해발 475m.
이름부터 오늘 일정에 딱 맞았다.
역 앞에는 ‘立山駅’과 함께 날짜까지 표시된 기념촬영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2026년 5월 25일.
오늘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기록이다.
나도 찍고 마님도 찍고 둘이 함께 사진도 남겼다.
오늘은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한다.
이제부터 보는 것 하나하나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풍경일 테니까.
우리가 예약한 다테야마 케이블카는 오전 7시 출발편이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니 상황이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매표소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여유가 있었다.
이미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이블카 승차 줄에는 우리가 1번으로 섰다.
“ㅎㅎ 우리가 1번이네.”
이 맛에 미리 예약하는 거다.
한편 매표소 쪽에는 현장에서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서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알펜루트에 예약도 하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날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오전 7시 정규편에 이어 7시 10분 임시편까지 편성됐다.
전광판에도 07:00 출발,
그 아래에는 ‘次発 07:10発’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첫차를 기다리는 맨 앞자리.
이제 문만 열리면 된다.
다테야마역에서 비조다이라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고원버스를 타고 해발 2,450m 무로도로 올라간다.
새벽 4시 12분 라이브카메라로 바라보았던 그 설산 속으로 이제 우리가 직접 들어간다.
알펜루트 횡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8. 오전 7시, 다테야마 케이블카 맨 앞에서 진격
드디어 다테야마 케이블카를 탈 시간이 됐다.
오전 7시 출발편.
우리는 승차 줄에 가장 먼저 서 있었기 때문에 케이블카가 들어오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차량은 붉은색과 주황색 계열로 꾸며져 있었고 옆면에는 꽃과 새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케이블카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중에 매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가파른 산비탈에 놓인 레일 위를 달리는 차량이었다.
“이게 무슨 케이블카여. 그냥 산악열차지.”
나는 진행방향 쪽 자리를 잡았다.
선로가 바로 눈앞으로 보였다.
출발하자 기다란 레일이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위로 뻗어 있었다.
보통 철도에서는 보기 힘든 경사였다.
케이블에 이끌려 올라가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작은 산악열차를 탄 것 같았다.
잠시 뒤 터널이 나타났다.
열차는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 벽 바로 옆으로 레일과 케이블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케이블카와 교행했다.
우리가 올라가면 반대편 차량은 내려간다.
좁은 산속 선로에서 두 차량이 엇갈려 지나가는 모습까지 맨 앞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눈으로도 열심히 바라봤다.
알펜루트를 시작하자마자 교통수단부터 재미있었다.
9. 오전 7시 7분경, 비조다이라에 도착
약 7분 정도 올라가 오전 7시 7분경 비조다이라(美女平)에 도착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びじょだいら BIJODAIRA’라고 적힌 역명판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다시 교통수단을 바꿔야 한다.
고원버스다.
안내판에는 무로도와 구로베댐, 오오기자와와 나가노 방면으로 가는 고원버스 승차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계단을 올라 버스 승차장으로 향했다.
우리도 그 흐름을 따라갔다.
밖에는 흰색 차체에 붉은 무늬가 들어간 알펜루트 고원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버스를 타고 해발 977m의 비조다이라에서 해발 2,450m 무로도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높이 차이만 해도 1,400m가 넘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테야마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왔는데 이제는 버스를 타고 더욱 깊은 산속,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역 안 모니터에는 무로도와 다이칸보의 현재 모습도 나오고 있었다.
무로도 해발 2,450m, 기온 11.1도.
다이칸보 해발 2,316m, 기온 12.1도.
화면에 보이는 무로도의 설산은 여전히 깨끗했다.
“좋아. 날씨 살아있네.”
이제 저곳으로 직접 올라간다.
10. 오전 7시 17분, 에렌과 미카사 무로도로 진격의 거인
오전 7시 17분경 고원버스가 비조다이라를 출발했다.
“자, 무로도로 진격의 거인.”
오늘 나는 에렌이다.
그리고 옆에 앉은 마님은 미카사.
ㅋㅋㅋ.
버스가 출발하자 처음에는 울창한 숲길이 이어졌다.
창밖으로 거대한 삼나무들이 지나갔다.
어떤 나무는 굵기가 어마어마했다.
산 아래에서는 이제 완전히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가는 풍경이었다.
나무에는 푸른 잎이 가득했고 햇빛도 강했다.
그런데 버스가 고도를 높일수록 조금씩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약 12분쯤 지났을 때 왼쪽 창밖 멀리 깊은 협곡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길고 하얀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쇼묘폭포였다.
“자기야, 저기 봐. 폭포.”
깊게 파인 협곡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가 멀리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잠깐 나타났다가 버스가 움직이면서 다시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버스 여행이라 원하는 곳에 멈출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이동하면서 하나씩 풍경이 나타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11. 초록의 산에서 눈의 나라로
버스가 계속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풍경이 확실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 정상과 골짜기에 조금씩 남아 있던 눈이 점점 많아졌다.
눈이 남은 산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어느 순간부터는 창밖 어디를 보아도 설산이었다.
“와…….”
“이야…….”
마님과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5월 25일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완연한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가는 시기다.
그런데 눈앞에는 겨울 같은 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산 능선을 따라 하얀 눈이 줄무늬처럼 남아 있었고 골짜기마다 눈이 길게 이어졌다.
조금 더 올라가자 도로 주변까지 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산 아래에서 보았던 초록색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멀리 아래쪽을 바라보면 우리가 올라온 평야가 희미하게 보였고 바로 주변에는 눈밭과 설산이 펼쳐졌다.
고도 차이가 만들어낸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 계절에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능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어디를 찍어도 설산이었고 어디를 보아도 장관이었다.
아까 새벽 라이브카메라를 보며 ‘나이스’를 외쳤던 것이 다시 생각났다.
오늘 제대로 걸렸다.
날씨가 정말 끝내줬다.
12. 유키노오타니, 영화 『비밀』 속 그곳을 지나가다
무로도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옆에 쌓인 눈이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사람 키보다 낮았던 눈벽이 어느 순간 버스 창문 높이를 훌쩍 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설벽이 나타났다.
유키노오타니(雪の大谷).
눈의 대협곡이었다.
버스는 양쪽으로 높게 솟은 설벽 사이를 달렸다.
창문 바로 바깥으로 거대한 눈벽이 지나갔다.
눈은 한 덩어리의 흰 벽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 눈이 여러 차례 쌓이고 굳으면서 생긴 층이 줄무늬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 내가 여기를 진짜 왔네.”
감격스러웠다.
유키노오타니는 내가 오래전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비밀』을 영화로 만든 작품을 통해서였다.
영화 초반에 스키버스가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달린다.
운전기사는 돈을 벌기 위해 무리하게 운전을 계속하다가 피로가 쌓였고 결국 졸음운전을 하면서 사고를 낸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스기타 나오코와 딸 모나미도 사고를 당한다.
어머니 나오코는 죽고 딸 모나미는 살아남는다.
그런데 병원에서 깨어난 딸 모나미의 몸속에는 어머니 나오코의 인격이 들어와 있다.
몸은 딸인데 영혼은 엄마.
히로스에 료코가 딸 모나미를 연기했던 영화다.
참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버스가 거대한 눈벽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기가 어디여? 나중에 꼭 한번 가봐야겄다.”
그곳이 다테야마의 유키노오타니였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마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지나고 있었다.
영화로 처음 본 장소를 실제로 찾아왔다는 것이 묘하게 감격스러웠다.
“자기야, 내가 영화에서 보고 꼭 와보고 싶다던 데가 여기여.”
창밖으로 설벽이 계속 지나갔다.
또 영화 『비밀』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13. 오전 8시경 무로도, 먼저 눈의 회랑으로
오전 8시경 무로도에 도착했다.
해발 2,450m.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렸던 장소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우리가 버스를 타고 지나온 유키노오타니 설벽 산책로는 아직 들어갈 수 없었다.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안내판에는 ‘SNOW WALL WALK’ 개방시간이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남았네.”
그냥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무로도에는 볼 것이 많다.
우리는 먼저 눈의 회랑, 스노 코리도(Snow Corridor) 쪽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파란 하늘과 눈밭이 한꺼번에 눈앞으로 들어왔다.
정말 새하얀 세상이었다.
눈을 파서 만든 길 양쪽으로 높은 눈벽이 이어졌다.
사람이 그 사이를 걸어가니 눈의 높이가 더 실감났다.
마님과 나도 눈의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부터 찍었다.
나 혼자 한 장.
마님과 둘이 한 장.
그리고 눈벽을 만져보았다.
5월 말에 이렇게 두꺼운 눈벽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있으니 참 신기했다.
“자기야, 손 한번 찍어봐.”
둘이 나란히 손바닥을 눈벽에 꾹 눌렀다.
눈 위에 마님 손자국과 내 손자국이 나란히 남았다.
한번 더.
또 한번.
사진도 남겼다.
별것 아닌 손자국인데도 이런 곳까지 마님과 함께 왔다는 기록 같아서 좋았다.
눈 속에 작은 인형을 올려놓고 사진도 찍고, 설벽에 기대 장난스러운 자세로 사진도 남겼다.
나도 한쪽 다리를 들고, 마님도 한쪽 다리를 들고.
ㅋㅋㅋ.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벽 사이에서 둘이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아까 버스를 타고 올라오며 설산을 바라볼 때부터 계속 감탄했는데 막상 직접 눈 위를 걷고 눈벽을 만지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오전 8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다.
유키노오타니 정식 개방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무로도 고원을 제대로 돌아보기로 했다.
14. 스키를 메고 설산을 오르는 사람들
눈의 회랑을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무로도 고원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 안내도를 보며 다테야마 무로도산장과 미쿠리가이케 쪽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 아래 사방으로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녹아 드러난 돌길도 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다시 온통 눈밭이었다.
이런 풍경 속을 걷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런데 설원 위를 걷다가 더 신기한 사람들을 보았다.
스키를 메고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이었다.
스키장처럼 리프트나 곤돌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키와 장비를 직접 짊어지고 눈 덮인 산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야, 저 사람들은 스키에 미친 사람들인가 봐.”
저 높은 곳까지 자기 발로 올라간 뒤 스키를 타고 내려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타고 내려오는 것은 신나겠지만 그 한번을 위해 무거운 스키를 메고 설산을 올라간다.
나는 도저히 못할 짓 같았다.
그래도 저 사람들에게는 저게 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겠지.
5월 말인데도 아직 스키를 탈 수 있는 곳.
눈앞에 펼쳐진 무로도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굳이 장비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15. 설산 한가운데서 먹은 아침 아닌 아침
다테야마 무로도산장 쪽으로 걸었다.
눈밭 사이로 ‘立山室堂山荘’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보였다.
산장 주변에는 눈이 아직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우리는 산장 앞쪽에 마련된 야외 쉼터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침 아닌 아침을 먹었다.
어제 도야마역 북쪽 로손에서 미리 준비해온 먹을거리들을 꺼냈다.
바나나, 샌드위치와 빵, 스타벅스 커피.
별것 아닌 편의점 음식이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새하얀 설원과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자기야, 여기서 먹으니께 이것도 꿀맛이네.”
정말 그랬다.
호텔 조식이나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아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있었다.
해발 2,450m 설산 한가운데 나무 테이블에 앉아 사랑스러운 마님과 함께 먹는 아침이었다.
바나나 하나를 먹으면서도 자꾸 산을 바라보게 됐다.
사진도 찍었다.
먹다가 찍고,
산을 보다가 찍고,
마님과 같이 또 찍었다.
아침 4시부터 움직였으니 배도 고팠다.
맑은 하늘과 눈부신 설산을 바라보며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여행에서는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디에서 누구와 먹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이날 아침이 그랬다.
16. 뇌조를 만나고, 눈을 파내는 미니 포클레인까지
무로도산장 주변에서 뜻밖의 녀석도 만났다.
눈과 돌이 드러난 길가에 새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저거 뇌조 아녀?”
몸에는 갈색과 검은색 무늬가 섞여 있었고 배 쪽은 하얬다.
눈 위쪽에는 붉은색도 선명하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리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표식처럼 보였다.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크게 놀라 달아나지 않았다.
“얘는 산장에서 키우는 애인가?”
그때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리에 달린 표식 때문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야생의 설원에서 저렇게 가까이 새를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작은 굴착기 한 대가 엄청난 양의 눈 속에 파묻히다시피 들어가 눈을 퍼내고 있었다.
커다란 제설차도 아니고 조그만 미니 포클레인이었다.
그 작은 장비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한 삽씩 퍼내면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야, 5월 말에 아직도 눈을 파서 길을 뚫고 있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우리가 걷는 길 양옆으로도 사람 키보다 높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겨울 동안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는지를 눈앞에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곳에서는 봄이 와도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눈을 파내야 길이 다시 열리는 모양이었다.
산장 주변에서 뇌조 같은 새를 만나고, 바로 근처에서는 작은 굴착기가 설산을 파고 있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무로도의 조금 특별한 풍경이었다.
17. 미쿠리가이케와 무로도 고원을 걷다
아침을 먹은 뒤 다시 무로도 고원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은 정말 어디를 바라봐도 그림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눈밭이 이어졌고 그 뒤로 검은 산줄기와 눈이 만들어낸 무늬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눈이 녹은 곳에서는 키 작은 고산식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밭과 초록색 관목 사이로 돌을 깔아 만든 산책로가 이어졌다.
어떤 곳은 눈이 완전히 녹아 돌길이 드러났고, 조금만 걸으면 다시 눈길이 나타났다.
마님과 천천히 걸었다.
사진을 찍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자기야, 거기 서봐.”
이번에는 마님을 세워놓고 찍고,
조금 뒤에는 내가 서서 찍었다.
둘이 같이 셀카도 남겼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커다란 바위에 붉은 글씨로 표시된 표석도 보였고, 라이초소(雷鳥荘)와 미쿠리가이케 방면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나타났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 한 대가 무언가를 길게 매달고 날아갔다.
도로로 물자를 실어 나르기 어려운 높은 산이다 보니 산장이나 시설에 필요한 물자를 옮기는 것 같았다.
설산을 배경으로 헬리콥터가 물건을 매달고 날아가는 모습도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조금 더 가자 화산가스에 주의하라는 안내판도 보였다.
이 주변 아래쪽에는 지고쿠다니가 있다.
눈 덮인 고요한 설산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 잊기 쉽지만 이곳 다테야마가 화산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이라는 것도 실감났다.
한쪽에는 여전히 겨울 같은 설원이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눈이 녹으면서 초록색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과 봄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18. 엔마다이에서 아이스크림, 얼어붙은 미쿠리가이케
엔마다이, 지고쿠다니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쪽까지 걸어왔다.
주변에는 눈 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그리고 미쿠리가이케온천 앞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연보라색 소프트아이스크림이었다.
“이런 데 왔으니 아이스크림도 먹어줘야지.”
설산을 배경으로 아이스크림을 들고 사진부터 찍었다.
내 것과 마님 것을 나란히 맞대어 건배하듯 사진도 한 장 남겼다.
나는 설산을 바라보며 한입 크게 먹었다.
차가운 눈밭에서 먹는 차가운 아이스크림.
이상한 조합인데 또 맛있었다.
그리고 미쿠리가이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진에서 보던 짙고 푸른 미쿠리가이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호수 대부분이 아직 눈과 얼음에 덮여 있었다.
가장자리 일부에서만 얼음이 녹으면서 옥빛 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얼음 사이로 드러난 푸른빛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그 뒤로는 눈 덮인 다테야마의 산들이 둘러서 있었다.
완전히 녹은 여름의 미쿠리가이케도 아름답겠지만 우리가 본 것은 5월 말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마님과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아침부터 설산을 원 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디를 돌아봐도 또 다른 산이 있었고,
몇 걸음만 옮겨도 풍경이 달라졌다.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다.
우리가 기다리던 오전 9시 30분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유키노오타니 설벽을 직접 걸으러 갈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