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2일차, 2026.05.23.(토요일)[오전편]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길을 찾아
1.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길을 찾아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윤봉길 의사님이 순국하신 곳, 순국기념비, 일제가 의사님의 유해를 몰래 묻었던 노다야마 암장지, 그리고 그 암장지를 평생 지키고 보존하는 데 힘쓴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까지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전날 인천공항에서 사 온 ‘처음처럼’ 한국소주 한 병도 챙겼다.
오늘은 이 술을 윤 의사님께 올릴 날이었다.
마님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2. 아침 커피를 들고 9번 승강장으로
가나자와역에 도착해서는 먼저 스타벅스에 들렀다.
일본에 오면 이상하게 스타벅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아침부터 먼 길을 움직여야 하니 커피 한 잔을 사 들었다.
전날 저녁 미리 사전정찰을 해두었던 가나자와역 동쪽 출구 9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 전광판에는 오전 7시 19분 출발, 21번 北陸学院大学(호쿠리쿠가쿠인대학)행 버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어제 미리 승강장 위치까지 확인해둔 덕분에 아침에는 헤맬 일이 없었다.
오전 7시 19분.
마님과 함께 21번 버스에 올랐다.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가 들려 있었다.
3. 자위대 주둔지를 지나 윤 의사님의 순국지로
버스는 가나자와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육상자위대 관련 시설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金沢駐屯地(가나자와주둔지) 표지판이 보였고, 철책 너머로 자위대 시설과 군용차량, 자위대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나자와는 과거 일본군 제9사단이 주둔했던 도시다.
전날 윤봉길 의사님이 수감되었던 가나자와성 위수구금소의 흔적을 찾아다녔고, 오늘 다시 자위대 시설들을 지나고 있으니 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군사도시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버스 안 전광판에는 다음 정류장으로 金大附属学校自衛隊前(금대부속학교자위대앞)이 표시되었다.
우리는 野田(노다)를 지나 윤 의사님이 순국하신 三小牛山演習場(삼소우산연습장)으로 향했다.
4. 三小牛山演習場(삼소우산연습장), 굳게 닫힌 문 앞에서
三小牛(미스코우지) 정류소에서 내려 마님과 함께 걸었다.
곧 ‘陸上自衛隊 三小牛山演習場(육상자위대 삼소우산연습장)’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나타났다.
바로 이곳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님이 총살형으로 순국하신 곳이다.
지금은 일본 육상자위대의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철책 곳곳에는 ‘立入禁止(출입금지)’, ‘KEEP OUT’이라는 붉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고, 쓰레기와 오물 투기, 불 사용, 대나무, 나무, 토사 채취 등을 금지한다는 표지판도 보였다.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철문 너머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 어딘가에서 스물다섯의 젊은 독립운동가가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님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묵념을 올렸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울고 싶었다.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
그분이 마지막 숨을 거둔 바로 그 땅 앞에 내가 서 있었다.
5. 순국지를 떠나 노다야마로
삼소우산연습장을 뒤로하고 노다야마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이동한다.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었다.
거리는 대략 2km, 시간은, 숲길이라 30분정도 소요되었다.
아침공기는 신선하고 선선했다.
숲속은 상쾌했다.
길가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이어졌고, 곧게 뻗은 삼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햇빛은 숲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왔고 길 주변에는 푸른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가득했다.
걷기에는 참 좋은 길이었다.
조금 덥기는 했지만 한적한 숲길을 마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에 大乗寺山動物霊園(대승사산동물영원)도 지나갔다.
산속에 마련된 화장실도 눈에 들어왔다.
일본은 이런 외진 산속의 작은 공중화장실도 건물을 단정하게 만들어놓고 내부를 깨끗하게 관리한다. 비데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6. 슬픈 역사를 찾아가는 행복한 길
숲은 깊고 조용했다.
마님과 나는 나란히 걸으며 사진도 많이 남겼다.
커피를 손에 들고 숲속에서도 함께 사진을 찍었고, 길이 열리며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서는 멀리 가나자와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오늘 찾아가는 장소가 지닌 역사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마님과 함께 걷는 지금의 나는 행복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고, 숲길을 걷고,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그냥 주어진 일이 아니다.
윤봉길 의사님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그 생각을 하니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행복이 새삼 고마워졌다.
7. 노다야마에서 만난 두 갈래의 길
노다야마 공동묘지 일대로 들어서자 가나자와 시내가 아래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마님과 함께 그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조금 더 걸어가자 마침내 익숙한 한자가 적힌 안내판이 나타났다.
尹義士殉國碑(윤의사 순국비) 60m →
← 尹義士遺詩碑・暗葬跡碑(윤의사 유시비·암장적비) 70m
한쪽은 순국기념비로, 다른 쪽은 암장지로 이어지는 갈림길이었다.
우선 순국기념비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8. 尹奉吉義士殉國紀念碑(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숲속 계단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검은색의 커다란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尹奉吉義士殉國紀念碑(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비석 앞에는 태극기와 꽃들이 놓여 있었고, 거북 모양의 받침 위로 검은 비신이 높이 서 있었다.
주변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멀리 일본 가나자와의 산속에 우리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이렇게 크게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9. 윤 의사님의 순국기념비터를 쓸다
기념비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닥에 나뭇가지와 솔잎 같은 것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침 주변에 빗자루가 놓여 있었다.
빗자루를 들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것만 조금 치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번 쓸기 시작하니 자꾸 욕심이 났다.
“이왕 하는 거 깨끗하게 해드리자.”
비석 앞부터 주변 바닥, 난간 틈까지 계속 쓸었다.
한쪽에는 싸리빗자루가 있었고 다른 빗자루도 있어 번갈아 사용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땀이 뻘뻘 났다.
마님은 옆에서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한참을 쓸고 나니 기념비 주변이 한결 깨끗해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예라도 올리고 싶었다.
10. 기념비 앞에서 올린 묵념
청소를 마친 뒤 마님과 함께 순국기념비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윤봉길 의사님을 생각하며 묵념을 올렸다.
기념비 옆에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는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판에는 우리말로도 방문객들에게 방명록에 성함을 적어달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마님과 나도 방명록을 펼쳤다.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글이 여러 줄 적혀 있었다.
우리도 이름과 감사의 마음을 남겼다.
먼 타국까지 윤 의사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있다는 흔적이었다.
11. 뜻밖에 만난 대구에서 온 참배객
순국기념비 주변을 깨끗이 쓸고 마님과 함께 묵념을 올린 뒤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올라왔다.
이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말을 나눠보니 대구에서 혼자 여행을 온 분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쯤 어려 보였고, 이미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먼저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분도 우리를 무척 반가워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분을 만나니 반갑네요.”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관광지를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일본 가나자와의 노다야마 깊숙한 곳까지 윤봉길 의사님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서로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 의사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우리가 타고 온 21번 버스에서 봤던 분이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 부근에서 그분이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는데, 버스기사님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분은 다시 버스에 올라왔다가 잠시 뒤 내려갔다. 왜 다시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시에는 요금 문제 때문인가 싶었다.
무슨 이유로 버스기사님이 불러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었다.
아침 버스에서 우연히 보았던 사람을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기념비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멀리 대구에서 온 그분이나 마님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나나 마음은 같았다.
나라를 위해 스물다섯의 젊은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님을 잊지 않고, 머나먼 일본 땅의 순국지와 암장지까지 직접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마음.
그 마음이 같았기에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가웠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숲길 안쪽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로 가기 위해 먼저 순국기념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나자와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는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
12. 암장지로 향하는 숲길
순국기념비를 나와 이제 윤 의사님의 암장지로 향했다.
숲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었다.
바닥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양쪽으로 나무와 숲이 빽빽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들어왔다.
순국기념비에서 암장지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순국지를 찾았고, 순국기념비 앞에서 묵념도 올렸다.
이제 일제가 윤 의사님의 유해를 몰래 묻었던 바로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13. 尹奉吉義士暗葬地跡(윤봉길의사 암장지적)
숲길 끝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웅장한 묘소도 아니고 화려한 시설도 아니었다.
나무와 풀로 둘러싸인 산속 한쪽에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정면에는 커다란 자연석이 놓여 있었고 그 돌에는
尹奉吉義士
暗葬之跡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옆에는 윤 의사님의 흉상이 있었고,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 새긴 돌기둥도 서 있었다.
“장부가 집을 나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주변에는 설명판과 資料庫(자료고), 찬조금함, 여러 개의 향로와 참배용 물품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梅軒(매헌)’이라 적힌 표지도 쇠사슬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윤 의사님의 유해가 이곳에 암장되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일제가 윤 의사님의 유해를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린 자리였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그 자리.
더 가슴 아픈 것은 암장된 위치였다.
이 자리는 당시에도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오르내리던 길목이었다. 지금도 암장지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중화장실이 있다.
일제는 윤 의사님의 유해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숨긴 것도 모자라, 일반인들이 그 사실도 모른 채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도록 이런 자리에 암장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밑에 윤봉길 의사님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이 길을 밟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참담했다.
순국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없었다.
죽은 뒤에도 모욕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이었다.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유해가 발굴되고 이곳이 암장지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비로소 지금의 표석과 안내시설이 마련되었다.
지금이야 태극기도 있고, 윤 의사님의 흉상도 있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참배객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는 표식 하나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밟고 지나가는 길 아래에 스물다섯 살 윤봉길 의사님이 누워 계셨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봤다.
“여기였구나.”
책에서 읽고 사진으로 보던 장소와 실제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전혀 달랐다.
14. 늦게 찾아온 후손의 술 한 잔
가방에서 아침부터 들고 온 ‘처음처럼’을 꺼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술이었다.
예로부터 술은 제례에서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니라, 정성과 공경을 담아 올리는 제물이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윤 의사님께 술 한 잔이라도 직접 올리고 싶었다.
오늘 이 술을 가지고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병뚜껑을 열었다.
윤 의사님께 먼저 술을 올렸다.
술을 올린 뒤 큰절을 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렸다.
절을 마친 뒤 술을 조금씩 암장지 주변에도 뿌렸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누워 계셨을 의사님을 생각했다.
마님도 내 뒤를 이어 윤 의사님께 큰절을 올렸다.
“의사님, 늦게 찾아왔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여행객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후손으로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마음이었다.
참배를 마친 뒤에는 이곳에도 마련되어 있는 방명록을 펼쳐 마님과 함께 이름과 글을 남겼다.
15. 암장지를 지켜온 사람들의 흔적
암장지에는 윤 의사님만 계신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박인조 선생님의 흔적이 컸다.
우리에게 윤봉길 의사님은 잘 알려져 있지만, 먼 일본 땅에서 그 흔적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윤 의사님의 흔적을 직접 보고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암장지에는 박현택이라는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안내판도 있었다.
설명이 필요한 방문객은 연락하면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한번 드려볼까 생각했지만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대신 이곳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찬조금함에 20만 원을 넣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데 좋은 일로 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윤 의사님의 암장지에서 절을 올리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찬조금까지 넣으며 이곳에서의 참배 일정을 모두 마쳤다.
하지만 아직 찾아뵐 분이 한 분 더 계셨다.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평생 지키고 보존하는 데 힘쓴 박인조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묘소는 암장지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5분 정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16. 윤봉길 의사의 곁을 평생 지킨 박인조 선생님을 찾아
윤 의사님의 암장지 일정을 모두 마친 뒤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갔다.
암장지에서 5분 정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선생님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은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생활하며 살아생전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었다. 월진회 일본본부 초대 회장을 맡아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윤 의사님의 유해가 발굴된 뒤에도 이곳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돌보고 지켜왔으며,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이 암장지가 온전히 보존되어 후손들이 찾아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박인조 선생님 같은 분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생전에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 곁에 있고 싶다는 뜻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도 윤봉길 의사를 곁에서 모셔야겠다.”
그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박인조 선생님은 생전에 평생 지켜온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있는 노다야마에 묻혀,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의 곁을 지키고 계셨다.
묘비에는
密陽(밀양) 朴仁祚之墓(박인조지묘)
라고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묘소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윤 의사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흔적을 끝까지 지킨 사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묘소 주변에는 박인조 선생님과 관련된 비석도 있었고, 충남 예산군에서 세운 감사비도 자리하고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세워진 감사비 앞에 서서 나는 그 글을 천천히 읽었다.
감사비에는 월진회 일본본부 초대회장 박인조 선생님이 평생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키고 관리해 온 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박인조 선생님께서 평생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킨 데 대한 감사의 뜻과 함께,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지닌 중요성을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알리고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평생 애쓴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글이 담겨 있었다.
충남 예산군에서 세운 이 감사비에는 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뜻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글을 읽고 있으니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단순히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남아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났다.
누군가는 이곳을 기억했고, 누군가는 찾아왔으며,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지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박인조 선생님이었다.
묘소 한쪽에는 개 한 마리를 형상화한 석상이 놓여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의 곁을 지켰던 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평생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킨 박인조 선생님과, 그 선생님 곁을 지켰던 개.
작은 개 석상 하나까지도 이곳에서 이어져 온 긴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지켜온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곁을 지켜온 작은 생명까지.
노다야마에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역사를 이어온 기억들이 함께 남아 있었다.
17. 자위대의 흔적을 보며 가나자와역으로
이제 가나자와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아침부터 계속 걸어다닌 데다 날씨도 제법 더워져 땀이 많이 났다.
野田(노다) 정류장에 도착한 뒤에는 10분에서 15분 정도 버스를 기다렸다.
마님은 정류장 옆에서 남아 있던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잠시 뒤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타니 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까 순국기념비에서 만났던 대구에서 온 참배객이었다.
아침 버스에서 처음 보고, 순국기념비에서 다시 만나고, 이번에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 만난 것이다.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만났다.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윤 의사님을 찾아 가나자와까지 온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산길을 걷고, 다시 같은 버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가나자와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위대의 흔적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타고 순찰하는 자위대원들도 보였다.
전날 가나자와성에서 일본군 제9사단의 흔적을 보았고, 오늘은 가나자와주둔지와 삼소우산연습장, 자위대원들을 연이어 마주쳤다.
가나자와를 여행하며 내가 받은 인상은 분명했다.
“가나자와는 참 자위대의 흔적이 많은 도시구나.”
버스는 犀川(사이천)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철제 트러스교도 지나갔다.
푸른빛 철골 사이로 강과 가나자와 시내가 보였다.
아침부터 산속을 걸으며 이어졌던 참배길이 다시 도시의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8. 참배길을 마치고, 이제 도야마로
가나자와역에 도착했다.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서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지와 순국기념비, 암장지를 찾아 걷고, 마지막으로 박인조 선생님께까지 인사를 드리고 돌아온 참배길도 이제 끝이 났다.
오전 내내 마음속에는 윤 의사님이 계셨다.
슬프기도 했고, 먹먹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먼 타국 땅에서 그 마지막 흔적을 하나씩 찾아 직접 걷고 절을 올리고 나니,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숙제 하나를 마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잠시 숨을 돌리고 짐을 챙겨 가나자와를 떠날 시간이다.
오후에는 北陸新幹線(호쿠리쿠신칸센)을 타고 富山(도야마)으로 넘어간다.
아침에는 한 영웅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걸었고, 오후부터는 다시 여행자의 길로 돌아간다.
가나자와에서의 마지막 오전.
그렇게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을 찾아 나선 나와 마님은 참배길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 여행지, 도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