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 특별기고]
히다의 산과 사람을 글로 남긴 여덟 문인
― 히다민속촌 문학산책로에서 만난 작가들
히다노사토로 향하던 길은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다카야마 시가지를 벗어나자 논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낮은 산과 산촌마을이 이어졌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빛 논이 펼쳐져 있었고, 길가에는 한여름의 수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보라색과 연보랏빛 꽃이 초록빛 논과 숲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모습이 제법 잘 어울렸다.
산길로 조금씩 올라가면서 산악자료관(山岳資料館)을 지나고, 옛 노쿠비가 주택(旧野首家住宅)과 향창(郷倉) 같은 오래된 건물도 만났다. 낡은 목조건물의 지붕 위에는 돌들이 올라가 있었다. 히다노사토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산과 눈, 바람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길은 울창한 나무 그늘 속으로 이어졌다.
한쪽으로는 논과 산촌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길가에는 수국이 피어 있었다. 한여름 아침 햇볕은 벌써 따가웠지만 나무 아래로 들어가면 잠시나마 시원한 그늘이 이어졌다.
그런데 걷다 보니 길바닥에 이상한 표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EC.9’, ‘NO.12’.
십자표시와 함께 측량점으로 보이는 표시들이 길을 따라 찍혀 있었다.
“여그 또 길 넓히거나 공사헐라는 건가?”
나중에 알아보니 이 문학산책로는 실제로 2023년 측량설계를 시작으로 정비공사와 부지조성, 공원정비가 이루어졌고, 2024년에는 포장공사까지 시행된 곳이었다.
다만 내가 본 측량표시가 앞으로 또 다른 공사를 하기 위한 것인지, 앞서 시행한 정비사업이나 유지관리를 위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文学散歩道’(문학산보도), 문학산책로라고 적힌 나무 안내판을 만났다.
안내판에는 여덟 명의 문인이 적혀 있었다.
①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② 후쿠다 유사쿠(福田夕咲)
③ 하야후네 치요(早船ちよ)
④ 에마 슈(江馬修)
⑤ 에나쓰 미요시(江夏美好)
⑥ 다나카 스미에(田中澄江)
⑦ 오도리 유키오(小鳥幸男)
⑧ 다키이 고사쿠(瀧井孝作)
처음에는 그냥 다카야마와 관련 있는 작가들의 문학비를 모아놓은 산책로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뒤 한 사람씩 찾아보니 이 여덟 명은 단순히 ‘다카야마 출신 작가’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 히다의 역사와 문화를 글로 남겼고,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히다를 문학의 원풍경으로 삼았다. 또 누군가는 북알프스와 호타카를 작품으로 남겼고, 누군가는 다카야마라는 도시 자체를 찬미했다.
그중 안내판을 보는 순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름은 따로 있었다.
“어, 이노우에 야스시네.”
1. 이노우에 야스시 ― 『둔황』의 작가를 다카야마에서 다시 만나다
여덟 명 가운데 내가 바로 알아본 사람은 이노우에 야스시였다.
나는 그의 작품을 딱 한 권 읽었다.
『둔황』.
오래전에 읽었지만 지금도 꽤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송나라 사람 조행덕(趙行徳)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시험을 치르지 못한 그는 우연히 서하 여인을 만나고, 그녀가 지니고 있던 낯선 문자를 접한다. 그 문자가 서하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행덕은 서하와 서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먼 길을 떠난다.
서역으로 간 조행덕은 그곳에서 한족 무장 주왕례(朱王礼)를 만나고, 서하를 세운 이원호(李元昊)의 세력이 팽창해가는 전쟁과 권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송과 서하, 위구르 등 여러 세력이 맞부딪치는 서역의 역사 속에서 조행덕 개인의 삶도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간다.
소설의 무대는 결국 둔황으로 이어진다.
내게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막고굴의 장경동에 수많은 불경과 문서가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역사적 수수께끼를 이노우에 야스시가 소설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부분이었다.
실제로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는 20세기 초 수만 점에 이르는 고문서와 불경, 그림 등이 발견됐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그 많은 문서는 왜 동굴 속에 감춰졌을까’라는 역사적 사실의 빈틈에 조행덕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집어넣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인물이 뒤섞이는데도 읽다 보면 정말 그 시대 어딘가에 조행덕이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둔황』은 오래전에 딱 한 권 읽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작품이지만 작가 이름만큼은 머릿속에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작가의 이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카야마의 아침 산책길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보니 이노우에 야스시는 내가 여행하고 있던 일본 북알프스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빙벽(氷壁)』은 호타카다케를 무대로 한다.
나일론 자일이 끊어져 등반자가 추락한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장편소설로, 호타카의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인간의 우정과 사랑,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걸었던 가미코치에서 고개를 들면 바로 호타카 연봉이 보였다.
나는 『둔황』으로 이노우에 야스시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번 여행의 핵심 무대인 호타카와 그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학산책로를 걷고 난 뒤에야 알았다.
다카야마와의 직접적인 인연도 있었다.
그는 1990년 다카야마를 위해 「飛騨高山・讃」, 즉 ‘히다 다카야마 찬’을 남겼다.
다카야마를 인간이 만들어온 오래된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자 크고 작은 산맥에 둘러싸인 산악도시로 바라본 글이다.
그러고 보면 묘한 인연이었다.
오래전 『둔황』 한 권으로 알게 된 작가의 이름을, 북알프스를 여행한 마지막 아침 다카야마의 산책길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대표작 : 『둔황』, 『빙벽』, 『천평의 용마루(天平の甍)』, 『투우(闘牛)』, 『시로반바(しろばんば)』, 『공자(孔子)』
2. 후쿠다 유사쿠 ― 다카야마 문단의 구심점
후쿠다 유사쿠는 다카야마에서 태어난 문인이다.
젊은 시절 도쿄에서 문학활동을 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다카야마의 문예활동과 향토문화 발전에 힘을 쏟았다.
시와 단가뿐 아니라 히다의 민속과 풍습, 고고학까지 연구했다.
특히 『山都年中行事』에는 히다 다카야마의 옛 풍속과 연중행사가 기록되어 있다.
단순히 이곳에서 태어난 시인이 아니라, 다카야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글로 남긴 향토문화 기록자이기도 했다.
고산시립도서관 근대문학관에서도 그를 다카야마를 대표하는 네 명의 근대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루고 있다.
대표작 : 『春のゆめ』, 『山花一束』, 『山都年中行事』
3. 하야후네 치요 ― 히다에서 시작된 여성의 삶
하야후네 치요는 현재의 히다시 후루카와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카야마에서 성장했다.
작가로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주물공장 도시의 노동자 가족과 청소년의 삶을 그린 『キューポラのある街』이다.
하지만 그녀의 문학적 뿌리에는 히다가 있었다.
『峠』를 시작으로 한 ‘ちさ・女の歴史’ 연작에서는 히다 지방을 무대로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그렸고, 『ふるさと飛騨』, 『わたしの飛騨』처럼 고향 히다를 직접 제목으로 삼은 책도 남겼다.
어린 시절 보고 듣고 경험한 히다가 평생 문학의 밑바탕에 남아 있었던 셈이다.
1989년에는 바로 이 히다민속촌 문학산책로에 그녀의 문장비가 세워졌다.
대표작 : 『キューポラのある街』, 『峠』, ‘ちさ・女の歴史’ 6부작, 『ふるさと飛騨』, 『わたしの飛騨』
4. 에마 슈 ― 히다의 역사를 소설로 만든 사람
에마 슈는 다카야마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의 히다와의 인연은 특히 깊다.
젊어서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작가생활을 했지만 1932년 대표작 『山の民』을 쓰기 위해 가족과 함께 다시 다카야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순히 책상 앞에서 소설만 쓰지 않았다.
히다의 옛 자료를 조사하고, 지역 노인들을 찾아가 옛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고고학 연구에도 몰두했고, 향토연구지 『ひだびと』를 발간하기까지 했다.
대표작 『山の民』은 메이지유신 전후 히다에서 실제 일어난 우메무라 소동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한 작품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만나고 역사를 조사한 뒤, 40년 넘게 계속 고쳐 썼다.
히다의 역사를 자신의 평생작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대표작 : 『山の民』, 『受難者』, 『本郷村善九郎』, 『氷の河』
5. 에나쓰 미요시 ― 오쿠히다에서 태어난 ‘산의 아이’
에나쓰 미요시는 지금의 히다시 가미오카에서 태어났고 다카야마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여러 지역을 옮겨 살았지만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간 곳은 고향 히다였다.
대표작 『下々の女』에서는 메이지·다이쇼·쇼와 세 시대를 살아간 한 여성의 생애를 히다의 역사와 풍속을 배경으로 그렸다.
그녀는 고향을 무대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飛騨雪解』에 실린 글에서는 맑은 날 산 위에서 야쿠시다케와 기타노마타다케를 바라보며 자신이 ‘오쿠히다에서 태어난 산의 아이’라는 사실을 기뻐하는 대목도 나온다.
이번 여행에서 직접 바라본 북알프스의 산들을 이 지역 출신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고향 풍경으로 보고 살았던 것이다.
대표작 : 『下々の女』, 『脱走記』, 『流離の記』, 『飛騨雪解』
6. 다나카 스미에 ― 산을 통해 히다와 만난 작가
다나카 스미에는 히다 출신이 아니다.
도쿄 출생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였지만 무엇보다 산을 무척 좋아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일본의 산을 직접 걸었고, 산에서 만난 꽃과 풍경을 기록했다.
대표작 『花の百名山』에는 서호타카다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그녀와 히다의 인연은 출생지가 아니라 북알프스의 산을 통해 이어졌다.
문학산책로에 세워진 문학비에서도 다카야마의 오래된 목조건축과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마음을 바라본 글을 만날 수 있다.
히다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산을 사랑하고 다카야마라는 오래된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글로 남긴 문인이었다.
대표작 : 『花の百名山』, 『新・花の百名山』, 『夫の始末』
7. 오도리 유키오 ― 히다를 기록한 향토문화인
오도리 유키오는 다른 작가들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소설가라기보다는 향토사가이자 하이쿠인, 지역문화인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오가키에서 태어났지만 다카야마의 오도리 집안으로 들어왔고, 이후 다카야마시 공무원과 지역 언론인, 문화단체 활동을 하며 평생 이 지역과 함께했다.
다카야마시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하이쿠 잡지 『飛騨』의 대표도 맡았다.
『飛騨百景』, 『図説飛騨の歴史』 등을 통해 히다의 역사와 풍경을 기록했고, ‘히다의 장인’에 관한 연구에도 참여했다.
문학산책로에 그의 비가 있는 것은 유명한 소설 한 편 때문이라기보다 히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평생 힘을 보탠 지역문화인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대표 저작 : 『飛騨百景』, 『図説飛騨の歴史』
8. 다키이 고사쿠 ― 히다 장인의 아들
다키이 고사쿠 역시 다카야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목수의 동량이었고 아버지는 목수에서 사시모노 장인이 된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히다의 장인’ 집안의 아들이었다.
젊어서 고향을 떠났지만 이후에도 다카야마와 노리쿠라, 히다 지역을 여러 차례 찾았다.
작품 속에서도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풍경과 가족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대표작 『無限抱擁』은 일찍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아내와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며, 『父』에는 장인이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담겨 있다.
1971년에는 다카야마시 명예시민이 되었고, 히다노사토에는 그의 문학비도 세워졌다.
고향을 떠나 살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평생 히다가 남아 있었다.
대표작 : 『無限抱擁』, 『父』, 『積雪』, 『野趣』, 『俳人仲間』
9. 문학산책로가 보여준 히다의 또 다른 얼굴
여덟 사람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나니 이 길의 의미가 조금 달리 보였다.
후쿠다 유사쿠, 에마 슈, 다키이 고사쿠처럼 다카야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고, 하야후네 치요와 에나쓰 미요시처럼 히다에서 보낸 시간과 풍경을 자기 문학의 뿌리로 삼은 사람이 있었다.
오도리 유키오는 히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했고, 다나카 스미에는 산을 통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노우에 야스시는 호타카를 『빙벽』의 무대로 삼고, 다카야마를 위한 글까지 남겼다.
그러고 보니 히다는 단순히 산이 높은 곳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눈 많은 산속에서 집을 짓고 살았고, 장인들은 나무를 다뤘으며, 그 속에서 누에를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한 세대를 다음 세대로 이어갔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 산과 사람, 생활과 역사를 글로 남겼다.
히다노사토로 이어지는 문학산책로는 어쩌면 옛집을 만나기 전에 먼저 그 집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만나는 길이었던 셈이다.
여행 당시에는 안내판 앞에서 이노우에 야스시 한 사람만 알아봤다.
“어, 이노우에 야스시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 여덟 명을 하나씩 찾아보고 나니, 그 안내판 하나에도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히다의 이야기가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여행은 현장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표지판 하나, 이름 하나가 집에 돌아와 다시 찾아보고 읽는 순간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이번 북알프스 여행도 그렇게 조금 더 길어졌다.
― 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북알프스 여행기 특별기고
[참고자료]
※ 문학산책로의 여덟 문인 명단은 2026년 7월 20일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飛騨民俗村 文学散歩道」 안내판을 기준으로 하였다.
1. 高山市図書館 煥章館 近代文学館
- 다카야마를 대표하는 근대문학자 소개
- 다키이 고사쿠, 에마 슈, 후쿠다 유사쿠, 하야후네 치요 관련 자료
- https://www.library.takayama.gifu.jp/
2. 岐阜県図書館
- 기후·히다 출신 문인 자료
- 하야후네 치요, 에마 슈, 에나쓰 미요시, 다키이 고사쿠 등의 생애와 작품세계 확인
- https://www.library.pref.gifu.lg.jp/
3. 高山市
- 히다민속촌 문학산책로 정비공사, 측량설계, 포장공사 관련 자료
- https://www.city.takayama.lg.jp/
4. 井上靖記念文化財団
- 이노우에 야스시 작품 및 발표자료
- 「飛騨高山・讃」의 다카야마시 시비문 관련 기록 확인
- https://www.inouezaidan.or.jp/
5. 新潮社
- 이노우에 야스시 『氷壁』 및 작품 해설
- 호타카 산악지대와 『빙벽』의 관계 확인
- https://www.shinchosha.co.jp/
6. 国立国会図書館サーチ
- 후쿠다 유사쿠 등 각 문인의 저서와 출판기록 확인
- https://ndlsearch.ndl.go.jp/
7. CiNii Research
- 오도리 유키오 등 향토문화인과 관련 저서·연구자료 확인
- https://cir.nii.ac.j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