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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 반 고흐
  • 유경희
  • 18,900원 (10%1,050)
  • 2022-11-10
  • : 690

이런 외로움과 우울 속에서 빈센트가 찾을 곳은 단 하나. 위기 때마다 그랬듯이 예술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에 매달렸다.
빈센트 역시 이러한 고갱만이 오로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주고, 화가 공동체라는 환상을 구현할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여기에는 두 사람간 모종의 비즈니스적인 타협이 있었다. 동생에 빚지고 있던 빈센트는 고갱과 손을 잡으면 다른 전위 화가들을 자극해 형제의 사업을 강력한 입지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고갱의 상승기류를 타고 자신의 작품 또한 팔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하튼 고갱을 확보하면 손해를 볼 리가 없다는, 나름대로 이재를 밝힌과감한 예측이었다.
<고갱의 초상>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뒷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고갱을 수상하게 여겼고, 어떤 이들은 그의 기묘한 매력에 굴복했다. 반 고흐가 하필 고갱의 뒷모습을 그린 것은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 삼베에 유채, 33×37센티미터, 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그러나 고갱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에게 유토피아란 대부분 돈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질적 야망을 지닌 전직 주식 중개인인 그에게는 부양할 여섯 식구와 까다로운아내가 있었다. 그는 테오와 할 수 있는 또 다른 원대한 사업적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예컨대 엄청난 기금을 모아 인상파 전문 화랑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빈센트는고갱의 제안이 터무니없다며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아를에서 빈센트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고향을 떠난 뒤 북유럽의 어떤 도시보다도 오래 머물렀고 수많은 대표작을 탄생시킨 곳이지만, 빈센트의 흔적은 가장 적게 남아 있는 도시였다.
노란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자주 간 카페, 첫 번째로 투숙한 호텔, 종종 들르던 매춘업소까지 완전히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사실 빈센트는 값싼 창녀조차 침대 혹은 작업실로 끌어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는 말이다.
빈센트는 돈을 아껴 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무시하고 노란 집의 인테리어를 위해 돈과 시간을 할애했다. 빈센트는 고갱을 만족시키기 위해 버려진 낡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내 장식과 가구에 큰돈을 들였다.
반 고흐의 노란 집이 있었던 자리
반 고흐는 아를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며 200여 점의 그림을 남겼음에도 오늘날 여기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유명한 노란 집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현재는 라마르틴광장 안 중앙 분수대 옆에 반 고흐가 그린 <노란 집>표지판만이 세워져 있다.
빈센트는 노란 집이 남프랑스의 색채를 찾아온 화가들에게 마법 같은 성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이러한 상상은 그림을 통해 완성되었다. 가로 90센티미터, 세로 60센티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라마르틴광장 2번지에 있는 변변찮은 건물을 기념비적인 노란색 건축물로 바꾸어 그렸다.
빵을 사 먹을 돈도 없이 궁색해진 빈센트는 동생에게는 내내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테오가 걱정하자 빈센트는 이런 정도의 사치는 불가피하다고 스스로 변호했다. 융자로 받은 300프랑까지 다 써 버리자 빈센트는 빚이 곧 저축이라며, 그런 공간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한결 자유롭게 작업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결국에는 큰돈이 되어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퐁타벤에 있던 고갱은 불화로 인해 추종자들이 모두 떠나고 돈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그때 테오는 도자기 몇 점을 구입해 주고 고갱이 퐁타벤에서 그린 그림을전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유인책으로 50프랑을 주고 나서야 고갱은 미루고 미루던 아를행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노란 집 >
반 고흐는 노란 집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거점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에 아를을 찾아올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테오의 돈으로노란 집의 인테리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구를 마구 사들였고, 현관에 둘 협죽도 화분도 두 개 샀으며, 밝은 세계에 대한 오마주 같은 해바라기 연작을 그려 벽면을장식했다. 캔버스에 유채, 91.5×72센티미터, 1888, 반고흐박물관, 암스테르담.
흰색으로 새로 칠한 벽에는 빈센트의 작품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고갱은 벽의 중앙에 걸려 있는 <해바라기>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감탄스러운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참신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빈센트는 고갱의 방에 어떤 그림을 걸었을까? 세 점의 작품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프러스나무 아래 산책하는 남녀>, <시인의 정원>과 그해 여름에 그린 <해바라기>가 그것이다.
나는 캔버스 세 개를 작업하고 있어. 첫 번째는 초록색 화병 속의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밝은 배경에 그린 15호 캔버스야. 두 번째도 세 송이인데, 그중 하나는꽃잎이 떨어지고 씨만 남았고, 또 하나는 봉오리를 그린 푸른색 배경의 25호 캔버스야. 세 번째는 노란색 화병에 열두 송이의 꽃과 봉오리를 그린 30호 캔버스지. 따라서 마지막 것은 너무나 밝고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어쩌면 이것으로 끝내지 않을지 몰라. 고갱과 함께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틀리에를 장식하고 싶어졌거든.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야. 네 가게 옆 레스토랑 문이 매우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잖아. 나는 그곳 창문의 커다란 해바라기를 언제나기억하고 있어. 이 계획을 실천하려면 열두 점 정도의 그림이 있어야 해. 그 모두는 파랑과 노랑의 심포니를 이룰 거야. 나는 아침 태양이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어. 왜냐하면 꽃은 빨리 시드니 단번에 그려야 하기 때문이야.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테이블에 놓인 책은 빈센트가 아끼던 졸라의 삶의 기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 역시 빈센트의 심경과 상황을 반영하듯이 탁자 위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는 것. 꽃이 책을 향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빈센트가 이 책에서 교훈을 얻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에게 협죽도는 자신의 광기 어린 생산력과 애정의 독성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자신이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바라기 그림에 매달려 있다고, 꽃이 빨리 시들기 때문에 단번에 달려들어 끝내야 한다고 소식을 전했다. 해바라기 그림은 이렇듯신속하고 거칠며 열정적인 붓질에 의해 탄생했다.
<협죽도가 있는 정물 >
반 고흐의 협죽도 그림은 해바라기 연작만큼이나 아름다운 정물로 꼽힌다. 녹색 잎과 주황색 꽃, 푸른색의 꽃병과 노란색의 책과 밝은 녹색의 배경 등의 색채 대비가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책은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도 그가 특히 좋아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다. 이 책은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그린 <성서가 있는 정물화>에도 등장한다. 캔버스에 유채, 73×60센티미터, 1888,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모델들이 빈센트의 그림이 이상하고 화가도 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 모델을 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100년 뒤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일, 혼이 담긴 초상화를 그려 내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흥미로운 사람이면 그리고 싶어 했다. 당시 인상주의는 인간 탐구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인물도 자연을 그릴 때처럼 순간적으로만 포착할 뿐이었다.
빈센트가 사로잡힌 것은 초상화였다. 그는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다.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가장 진지한 것의 표출이다"라고 말했다.
평생을 모델을 찾는 데 열중했던 그에게 초상화란 유일하게 사람을 소유하는 경험을 해 주는 장르였다. 그는 모델을 선정해 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그 자신이 주도적인 위치가 된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는 개성 있는 모델을 구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는 아를 여자들은 정말로 아름답단다. 그들은 프라고나르나 르누아르가 그린 여자들 같아"라고 썼다. 빈센트에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호의적인 드라가르카페의 여주인인 지누 부인을 그리는 일은 비교적 손쉬웠을 것이다.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지낼 때도 아를로 외출할 때 가장 만나고 싶어 한 사람은 지누 부인이었다. 부인도 자기처럼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동병상련의정을 느꼈던 것 같다.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초상 >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 관심이 많았던 반 고흐는 특히 아를 시절에 마흔여섯 점 정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조제프 룰랭과 그의 가족을 단골로 그렸다.
반 고흐와 룰랭의 인연은 비록 짧았지만 순수하고 호탕한 데가 있던 룰랭은 화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 캔버스에 유채, 54×65센티미터, 1889, 크뢸러뮐러미물관, 오테를로.
<룰랭 부인의 초상>
반 고흐는 룰랭보다도 그의 아내를 더 많이 그렸다. 그중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그녀가 요람을 흔드는 모습을 담은 초상을 여섯 점이나 남겼을 만큼 그녀의 모성적 이미지에 깊이 감응했다. 캔버스에 오일, 73×92센티미터, 1889, 크뢸러뮐러미술관, 오테를로.
< 아를의 여인 >
아를의 드라가르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도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단골 인물이었다. 화가는 그녀를 우울과 상실감에 젖어 있지만 관대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이렇듯반 고흐는 인물의 개성과 영혼을 포착하여 허식 없이 담아 내려 했다. 캔버스에 오일, 73.5×92.5센티미터, 1888, 오르세미술관, 파리.
아마 빈센트가 포착한 것은 우울과 상실감으로 나이보다 노쇠해진, 그러나 신뢰할 만한 관대한 여인상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를 책 읽는 여자로 묘사한 것! 그녀 앞에는 엉클톰스 캐빈』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놓여 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지성적인 여인으로 변모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빈센트가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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