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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당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작정 걷거나 독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한 켤레의 구두>반 고흐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낡은 구두 그림들을 보면 가난한 방랑자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캔버스에 유채, 41.5×37.5센티미터, 1887, 개인 소장.
북유럽의 습기와 혹한 속에서 수십 킬로미터의 황무지를 몇 시간씩 걷는 것이 몸에 밴 빈센트에게 걷기는 훗날에도 현실을 잊게 하는 동시에 살게 하는 수행법이 되었다. 언제나 부랑아 같은 남루한 옷차림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로 걷고 또 걷는 고행을 거듭하는 일이 평생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했던 빈센트는 남프랑스에 와서도 밤마다 산책길에 나섰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멀리 있는 행성들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한 상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지상에서는 창조할 수 없을 것 같은 천국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졸라는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졸라의 추종자인 모파상, 알퐁스 도데, 장 리슈팽, 조리 카를 위스망스,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의작품들도 읽었다. 특히 도데의 쾌활한 타르타랭같은 희극 작품은 자신과 테오와 여동생 빌레미나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쨌거나 빈센트를 만든 것의 8할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맹렬한 탐서가였다. 상당히 폭넓은 독서를 했던 그는 누구와도 폭넓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논쟁과 토론에 능했던 것도 바로 오랜 기간 습득해 온 독서력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글솜씨 또한 탁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읽기는 쓰기의 80퍼센트라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빈센트의 사회사상, 즉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19세기의 수많은 예술가, 저술가, 철학자 들이 공유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낭만주의 저술가인 토머스 칼라일, 디킨스, 미슐레가 자본주의 이전의 문화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19세기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비판했다는 점에 빈센트는 크게 공감했고, 그것이 그의 사회사상을 형성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엘리엇의 『애덤 비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등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다. 빈센트가 아를 시절에 그린 마담 지누의 초상화에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빈센트가 재정적인 불안감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지출을 아낄 수 없었던 부분이 책이었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도 구독했다.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
탁자 위의 책들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당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대의 삶을 담은 소설은 성서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캔버스에 유채, 93×73센티미터, 1887, 개인.
<낮잠 >
잘 감동할 줄 알았던 반 고흐에게는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특히 밀레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레미 시절에 밀레의 소묘 작품인 <한낮>을유화로 모사한 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발작에서 벗어날 때면 이렇듯 자신의 예술 행보가 시작된 밀레로 돌아갔다. 캔버스에 유채, 91×73센티미터, 1890, 오르세미술관, 파리.
빈센트는 특별히 매료된 화가는 밀레였다. 밀레의 작품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한 당시의 소박한 농촌 그림과는 달리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 빈센트가 본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흑백의 동판화였기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색과 빛이 더해진 원화는 성스러운 제단화 같기는 하지만 정치적 선전성은 약하다. 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가장 처음으로 몰입한 그림 중 하나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반에이크와 한스 멤링 같은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브뤼셀까지 갔고,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걸작이라고 판단한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준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아를에 와서는 빈센트의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라졌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영향이 컸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들라크루아적 감각에 따라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욱더 자유롭게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일찌감치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일본 그림을 보고 몸살을 앓았다. 당대 유럽에서는 ‘일본주의‘ 혹은 ‘일본 취향‘을 일컫는자포니슴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화가들 중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모든 만물을 처음 보듯 감탄했던 것처럼. 그래서 "되도록 많이 감탄하려무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감탄하지를 않아"라고 테오에게 보낸 조언은 비단 테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하고자 하는 존재 모두에게, 아니 그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잡지나 전단지처럼 가볍게 취급되었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 보던 화가겸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그 새로운 미감에 충격을 받았고, 친구인 마네와 드가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한낱 포장재에불과하던 우키요에가 희귀하고 신비로운 보물로 격상되는 순간이 아닌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우키요에라는 말은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浮世‘와 ‘그림‘을 뜻하는 ‘에絵‘가 결합한 것이다. 본래 전국시대 계속되는 내전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이승에서의 덧없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에도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자 대중의 일상과 쾌락적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림을 가리키게 되었다.
자포니슴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즉 유럽의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조형적 특질을 자기 작품 안에창조적으로 살리는 태도를 말한다. 1854년, 일본이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일본 미술의 영향이 서구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862년의 런던만국박람회와 1867년의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와 차 문화,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열렬해졌다.
빈센트는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너무나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만나게 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적인 감각과 묘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파리에 오기 전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작품을 그렸지만,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차츰 밝아지고 화사해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원색의 색채, 대담한 형태와 같은 표현법은 우키요에를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빈센트가 우키요에에 이끌린 것은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할 때도 유럽 국가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한 나라다.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온 도자기, 공예품, 우끼요에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살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1886년에 파리로 간 뒤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멋진 것, 훌륭한 것, 이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러니 실제 일본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저 빈센트가 추구하고 싶은 가장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일본과 우키요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짧은 연애처럼 막을 내렸다.
우키요에 전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빈센트였다.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유명 판화가의 우키요에를 모사했다. 파격적인 각도의 히로시게의 다리 그림은 빈센트의 아스니에르 철교 그림에서 재현되었다. 빈센트 역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우키요에의 가장 혁신적인 방법론을 인용하고 실험했다. 즉 원색을 사용한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와 윤곽선과 평면적인 구성 기법은 그의 그림을 명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아를시절,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배경에 사토 토라키요의 우키요에인 <게이샤가 있는 풍경>이 걸려 있다. 일본에 대한반 고흐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캔버스에 유채, 49×60센티미터, 1888, 코톨드미술관, 런던.
그가 찬양하던 일본으로 착각한 아를, 그곳에서 고갱과의 동거가 파국으로 끝나고 공동체의 이상이 결렬되자 비센트는 더 이상 일본도 우키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다리 >
런던만국박람회와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과 문화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 역시 우키요에의독특한 구도와 색채와 질감에 매료되어 직접 모사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54×73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화가들은 우키요에 덕분에 원근법이라는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을 파괴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키요에는 서양미술의 원칙, 즉 화면의 중심에 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명암 구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생각, 그림의 중심이 되는 대상을 그릴 때 그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유럽에서 자포니슴의 바람은 1910~1920년 사이에 사라져 갔다. 이는 자포니슴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미처럼 그저 동양에 대한취향의 하나로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자포니슴의 소멸은 그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하는데, 서구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비로운 타자이던일본이 이웃 나라를 무참히 짓밟는 나라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더 이상 일본은 신비한 유토피아로서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 여인>.
클로드 모네가 1876년에 열린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은 모네의 첫 번째 아내인 카미유다. 캔버스에 유채,
142.3×231.8센티미터, 1876, 순수미술박물관, 보스턴.
화가 공동체라는 이상을 찾아서빈센트는 1886년에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아를에 도착한 것은 1888년 2월 20일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이후 그는 1889년 5월 3일까지 1년 하고도 두 달 반 동안 아를에서 살면서 200점 이상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이상의 수채와 소묘를 그렸다.
329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아를은 로마제국 제3의 도시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735년부터 4년간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855년부터 사실상 독립 왕국인 아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9세기에 바이킹과 사라센 해적의 침공을 받으며 쇠퇴했고, 이로써 프로방스의 중심지는 마르세유로 옮겨졌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에 위치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론강 하류를 끼고 있으며, 삼각주를 형성하는 카마르그 평원에 위치해 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아렐라테Arelate라고 이름 지었는데, ‘늪지 속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빈센트라는 유명 화가가 아를을 이상향으로 낙점한 것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로 향하는 낭만적인 여행을 상상하고는 한다. 이렇듯 욕망은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갈리아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고대 로마의 번성한 도시였던 아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를 도와 마르세유를 침략한 뒤 점령한 기원전 49년부터 발전하기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시적이거나 동양적이거나 환상적인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화가들의 꿈이 공동체의 형식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고자 베르나르, 로트레크 등 여러 동료 화가들에게 아를로 올 것을 제안했다. 화가의 천국을 프로방스에 세우겠다는 꿈을 함께 실현해 보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당대 화가들 사이에서는 파리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그림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 클로드 모네는 앙티브로, 베르나르와 폴 시냐크와 카미유 피사로는 노르망디나 브르타뉴로 갔다. 고갱도 브르타뉴, 파나마,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타히티로 떠났다. 게다가 프로방스에는 빈센트가 좋아하는 화가인 몽티셀리와 세잔이 머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파리를 떠날 즈음 사실 그는 알코올에 빠져 있었다. 거의 알코올중독자 수준이었으며, 매춘의 쾌락과 매독의 위험에도 빠져 있었다. 테오도 이전처럼 형을말리기는커녕 전위적인 유행을 퍼트리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새 역할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아를에는 지금도 그 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1888년 2월, 화가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밝은 빛과 아름다운 자연이있는 이곳에 도착한 반 고흐는 고대 원형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빌렸다. 3개월 뒤에는 라마르틴광장에 있는 작고 노란 집을 빌려 이사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그 꿈의 실현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빈센트는 자신이 아를로 떠난 이유를 보다 드높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늘 추구해 오던 화가 공동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북쪽 출신의 사람답게 빛과 태양을 찾아서, 파리의 추위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파리 사람들의 냉정함과 동료 화가들의 끝없는 경쟁과 당파성이 싫어서, 신경쇠약과우울증 때문에 휴식이 필요해서, 돈 걱정을 덜해도 되는 건강한 시골 생활을 위해, 그림 구매자가 원하는 주제를 찾기 위한 사업적 모험을 위해, 새로운 예술적 탐색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빈센트의 전략적인 행동과 테오의 연줄로도 단 한 작품도 판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빈센트를 남프랑스로 향하게 했다.
아를과 일본의 유사성은 전혀 없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실 아를은 해안 지역도 아니고 특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은 아를을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아주 잠시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남프랑스에서 ‘완벽한 일본‘을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바로 눈앞에 일본이 있다고, 그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고 과장했다.
몽마주르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아를 전경반 고흐는 아를 인근에 있는 몽마주르수도원의 유적지를 적어도 50번은 다녀왔다고 했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한때 성지순례지로 유명했지만, 반 고흐 당시에는 많이 쇠락해 있었다. 화가는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순례하듯이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는 수도원이 자리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를 전경에 깊이 심취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먼저 아를은 남쪽 도시들 중 네덜란드와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를 주변의 평원은 개척지여서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인이나 포주와 싸웠고, 물감과 캔버스를 대 주던 장사꾼과도 싸웠으며, 파리로 보내는 소포와 운임 때문에 우체국 직원과도 싸웠다. 예민한 위장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과 싸웠고, 여지없이 그를 조롱하는 10대 아이들과도 싸웠다. 호텔 주인과는 난방과 관리비 문제, 불량한 화장실 상태, 포도주 맛 같은 사소한 이유로 싸움질을 해 댔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들을 따분한 사람, 놈팽이, 건달, 비열한 욕심쟁이라고비난과 불평을 쏟아 냈다.
빈센트는 자포니슴에 홀딱 빠져 있던 베르나르에게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아를에서 볼 수 있다면서 함께 살자고 부추겼다. 베르나르가 거절하자빈센트는 로트레크를 비롯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 화가들에게까지 편지를 써 가며 화가 공동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갱만이 가능성을 비추는 답변을 해 왔다.
그는 아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마르세유 같은 프로방스의 다른 지역으로 떠날까 하고 생각했다.
<아를의 정원>
아를의 화사한 봄은 반 고흐를 진정으로 매료시켰다. 파리 시절부터 시도한 그의 인상주의적 색채는 아를에 와서 완연히 무르익었다. 캔버스에 유채, 91×72센티미터, 1888, 덴하흐미술관, 덴하흐.
빈센트가 아를에 가장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고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구필화랑을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아를에서 살자고 했다. 그럴 수 없다면 최소 1년 동안만이라도 휴가를 내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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