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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 번개와 탁류 그리고 수차가 연주하는 괴이하고도 떠들썩한 음악에 감싸인 긴 하룻밤.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난 몇 가지 일은 그들이 품은 불안감을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탑에서 떨어진 한 여자. 사라진 그림 한 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자취를 감춘 한 남자.
폭풍우에 희롱당한 하룻밤의 끝.
그때가 되어서야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이상한 마지막 형태를 그들 앞에 드러냈다.
요란스레 몸을 떨며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숲의 나무들. 불어난 강의 거센 물살. 시커먼 모습으로 땅에 웅크린 저택, 그 옆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세대.......
그리고 그 폭풍우의 밤은 새벽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한곳에 엉긴 두툼한 구름들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사키다."
"그럴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몸을 일으키며 얼굴이 흰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왼손 약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오른손으로 비틀면서 말했다.
"마사키 씨의 그 묘안석 반지 자국이겠죠."
애벌레 사체와도 닮은 잿빛 물체. 부자연스럽게 끊긴 밑동에는 응고된 피가 엉겨 있었다.
"절단면의 상태로 보아서 오래된 것 같지는 않군요. 잘린 지 두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남자 한 명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뒤에 바짝 붙어 선 새하얀 네글리제 차림의 아리따운 소녀. 그 소녀를 보호하듯 두 남자가 양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약간 뒤에 선 두 남자. 남자들은 모두 잠옷 위에 뭔가를 걸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쪽에 남녀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하나.
새어나온 강렬하고도 야릇한 냄새에 모두 코를 막았다. 동시에 구역질을 한 사람도 분명 있었으리라.
단백질이 타는 냄새였다. 그리고 일제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냄새가 어디서 발생했을지 똑같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마사키......."
휠체어를 탄 남자가 괴로운 듯이 신음했다.
......맙소사."
그리고 폭풍우가 걷힘과 동시에 그날 밤의 ‘사건‘은 하나의 ‘해결‘ 속에 묻혔다.
...아아."
바닥을 뒹구는 둥근 물체를 보며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말을 흘려냈다.
"어떻게 이런 짓을."
그것은 사람의 잘린 머리였다.
새카맣게 불타서 흰 연기가 쉭쉭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몽땅 탔고 눈, 코, 입 전부 문드러져서 형체를 잃었다.
한편 남자가 쥔 불쏘시개 끝에도 물체 하나가 마치 꼬치처럼 꽂혀 있었다.
‘탑‘에서 떨어진 불행한 여자. 도난당한 그림. 자취를 감춘 수상한 남자. 그 남자를 쫓다가 끝내 소각로에서 토막 시체로 불탄 채 발견된 한 남자.
먼저 굴러 나온 머리와 마찬가지로 불에 타서 새카맣고 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인간의 팔. 아무래도 왼팔 같았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손에 손가락 하나가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엄지손가락부터 헤아려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왼손 약손가락.
소각로 안에서는 인간의 시체 한 구가 불타고 있었다.
머리, 몸통, 양팔, 양다리. 여섯 토막으로 잘린 하나의 몸이.
남자는 소각로 속을 헤집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이었지만 불쏘시개 자루를 쥔 그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불타는 물체 하나를 갈고리로 찍어서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9월 들어서 대체로 좋은 날씨가 이어졌지만, 어젯밤 뉴스에서는 태풍 몇 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28일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지금의 이 평온은 폭풍 전야의 고요일까.
야윈 몸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가슴 복판에서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지는, 말로 다할 수 없고 도망칠 길도 없는 전율.
산골짜기에 있는 이곳은 세상의 소란에 아랑곳없이 한적했다. 골짜기 물은 막힘없이 흘러갔고 세대의 수차는 쉴 새 없이 돌았다. 저택에는 나와 유리에, 구라모토 세사람이 조용히 살고 있었다. 통근하는 가정부 말고 찾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죽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취를 감춘 한 명의 남자.. 유리에라는 이 소녀의 마음에도 그 사건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상처라는 형태로.
요 1년 사이 나도 변했지만, 그녀 또한 상당히 변했다.
필시 현재의 나,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내게는 얼굴이 없다. 나는 내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이 저택 주인의, 원래 있어야 할 ‘얼굴‘을 본뜬 하얀 가면.
살에 착 감기는 고무의 감촉. 살아있는 얼굴에 쓰는 차가운 데스마스크.......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피로 물든 폭풍우의 그 밤으로부터.
파이프담배를 피우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1년 전의 그날 밤으로 사고의 촉수를 가만히 뻗었다. 그날 일어난 여러 일들, 그리고 그 후.......
생각해보니 작년 오늘, 9월 28일도 지금과 비슷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도 대형 태풍이 접근하고 있다고 뉴스에서 보도했다. 그리고 예보대로 몰아닥친 그거센 폭풍우.
"규슈의 오이타 현경에 있는 지인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니무라 님은 기묘한 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런 남자가."
"작년에 일어난 사건에 흥미가 있나 봅니다. 어제 갑자기 니무라 님을 찾아와서 사건에 관해 이것저것 묻더니 이곳 위치를 확인하고 내일 가봐야겠다고 했답니다.
니무라 님도 폐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인의 동생이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며 미안해하셨습니다."
거한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어깨가 실팍하고 넓은 데다 키도 큰 남자다.
올백으로 넘긴 백발성성한 머리카락. 넓고 각진 이마. 쌀알처럼 조그만 눈에 핏기 없는 두툼한 입술.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름이 두드러진 창백한 얼굴에 웃음 한 번 짓는 법이 없었다. 귀에 잘 들어오는 바리톤 목소리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 사람 이름은?"
"시마다라는 남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에게는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집사‘라는 명칭이 잘 어울렸다. 주인을 모시면서 그 뜻에 거스르는 일 없이 묵묵히 저택을 관리한다. 그리고일에 자신의 감정을 일절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재능이다. 구라모토라는 이 남자는 그러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1년 전 그날 밤, 불가능한 상황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 남자가 유령처럼 이 저택을 배회하지 않는 한.
나와 유리에는 한동안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하얀 가면 위에서 뭘 보고 있을까)
구라모토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경찰의 니무라 님 전화였습니다."
니무라라면 오카야마 현경 수사 1과의 경부다. 1년 전에 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맡아 수사했다.
9월 28일. 그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세 사람이 이 저택을 찾아오는 오늘만은.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방문자를 환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 외진 곳에서, 그것도 마을에서 뚝 떨어진 산속에서 이런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살겠는가.
"어떻게 할까요?"
"되돌려 보내."
"알겠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알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한다는 점에서는 구라모토와 마찬가지로 고마운 존재지만, 필요 이상으로 주눅 들어 있는 태도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구라모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때때로 나를 몹시 짜증나게 했다.
이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이다. 9월 28일. 후지누마 잇세이의 기일인 오늘 딱 하루.
기일이라고 하면 오늘은 예전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일 9월 29일은. 그렇다, 일찍이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였던그 남자, 마사키 신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9월 28일. 올해도 어김없이 이날이 돌아왔다. 오후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손님 네 명이 저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그리고 후루카와 쓰네히토.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어젯밤 뉴스에서 태풍 몇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오늘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다.
가면.
필시 현재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그가 자신의 그런 심정을 부정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불문곡직하고 그들의 방문을 거부할 수도 있다. 요 몇 년 그러지 않은 것은 아마 양심의가책 비슷한 감정 때문이리라.
(어쨌거나......)그는 눈을 감은 채 갈라진 입술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오늘도 올 것이다, 기정사실이니 하는 수 없지)이제 와서 자신의 굴절된 심리를 분석할 마음 따위 없었다. 그들의 방문이 성가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그뿐이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그러고 얼마 뒤 그 사람, 후지누마 기이치가 유리에를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고이치로가 기이치에게 미리 부탁을 해두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후지누마 기이치. 시바가키 고이치로가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던 화가 후지누마 잇세이의 외동아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한편 마사키는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열정은 남달랐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는 법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우연히 후지누마 잇세이의눈에 띄어서 대단한 호평을 들었다. 이것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회계사사무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잇세이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 수차는 마치......"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내 말이 없던 기이치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마치?"
쉰 목소리가 가면 틈으로 새어나왔다.
"마치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 이 공간에 정지시켜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12년 전의 사고......)(하지만 억울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덜커덩, 덜컥........
그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수차 소리가 그날 밤의 파멸의 외침과 겹쳤다.
"그래, 유리에는 내내 마음을 닫고 살았지. 12년 전에 그 아이 아버지가 죽고 이 저택에 살기 시작한 뒤로 줄곧."
"하지만 후지누마 씨, 그건......."
"알아. 내 탓이지. 내가 유리에를 여기, 저 ‘탑‘ 위에 가뒀어. 그 애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음, 후지누마 씨한테 유리에 씨는 잇세이 선생님이 남긴 예술작품과 같은 존재 아닌가요? 유리에 씨를 잇세이 선생님이 그린 풍경들 속에 가둬두고 싶었다, 그런 거죠?"
"아아......."
기이치는 헐떡이듯이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넌 역시 시인이야."
이 폐쇄된 시간과 공간에서 그녀를 그만 놓아주고 싶다고 나도 가끔 냉정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유리에는 말없이 자신이 오랫동안 갇혀 지낸 ‘탑‘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옆얼굴에서 그녀의 아버지 시바가키 고이치로의 모습을 보았다.
오카야마 현 북부. 수차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위치한 A** 마을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은 더 들어와야 하는 산간벽지에 있다. 주인의기괴한 외모에 빗대어 ‘가면 저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 중 하나였던 그. 열정과 진지함, 그리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기술을 지녔음에도 결국은 스승의 작품을 흉내 내는 것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남자.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이한 그의 유일한 걸작은 딸 유리에이리라.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덜커덩, 덜컥, 덜커덩.......
그날 밤. 1973년 12월 24일 밤, 한 차에 탄 세 명의 남녀. 후지누마 기이치, 마사키 신고, 그리고 마사키의 약혼녀 호쓰타 게이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 당시 고베에 있던 후지누마 저택의 파티에 함께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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