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규는 혼자서 빈집을 지키며 외출한 아내를 기다렸다. 마루 쪽문지방을 베고 누워 바라보니까 마당 풍경은 마루 안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였다. 밖은 오동나무의 넓적넓적한 잎사귀들이빼곡 들어차 있어서 햇빛은 좀처럼 새어들지 않는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잎사귀들이 서걱거리며 술렁일 때만 잎 틈새로 찢어진햇빛이 섬광처럼 번쩍번쩍 파열했다가 사라질 뿐이다. 햇빛을 받은 잎사귀들은 얼핏 보면 5월의 신록처럼 반투명의 엷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그물처럼 뻗어 있는 엽맥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P168
보나 마나 창틀에는 이 벌레들이 싼 똥이 석탄가루같이 까맣게떨어져 있으리라. 어제 아내는 드디어 비명을 질렀다.
"이젠 당신이 좀 어떻게 해봐요. 벌레를 잡든지 나뭇가지를 치든지 벌레들이 온 데다 기어다녀요. 방 안에도 들어오고…………"
그러나 석규는 제 방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P169
잎사귀를 따내려고 무용수처럼 뒤꿈치를 들고 팡팡한 궁둥이를 얄기죽거리는 모양을 창 너머로 바라볼 때마다 석규는 가슴이조마조마해지는 것이었다. 가슴에 안으면 뼈마디가 아프게 느껴질정도로 깡마르던 몸이 어느새 저렇게 살이 붙었나? 허리에, 허벅지에 살집이 투덕투덕 붙어 핫팬츠 밖으로 탱탱해진 아내의 몸매에석규는 적이 놀라는 것이었다. 눈부시게 희디흰 허벅지의 살빛은여차하면 당장 불타오를 휘발유처럼 위태위태해 보일 지경이었다.- P170
석규가 늪에 빠진 듯 이러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한지가 벌써 한달이 넘어 된다. 처음엔 일시적인 심적 현상이겠거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가도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없었다. 한밤중에 그 몇번이나 아내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당했던가. 아무리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썼지만 도무지 일을 치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구슬리고 달래고 꼬집어도 그놈은 껍질 속에서 통 기어나오지 않았다. 노상 오뉴월의 가래엿처럼 휘늘어져 있을뿐이었다.- P170
이렇게 징그러운 수컷같이 생겨먹은 나무에 핫팬츠 바람으로 매달려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아내는 이 이상한 동물과 썩 죽이 맞는 써커스단의 발랄한 조련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아내의 흰허벅지가 굵은 나무줄기에 칭칭 감겨 있는 환각에 사로잡힐 때도있었다.- P171
이제 와서 벌레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나무를밑동에서 싹둑 베어내버리는 것뿐이었다.
저 나무는 사년 전, 오랜 전세생활 끝에 이 두칸짜리 집을 사서이사 올 때 몸소 사다 심은 것이었다. 밑동이 종아리 굵기만 한 게다른 나무에 비해 퍽 실팍하고 값도 싸 보여서 사다 심었는데 그게알고 보니 개오동이었다. 단지 오동나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놀러 왔던 장모가 그렇게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개오동은 집안에 심는 것이 아니니 어서 뽑아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미신이 많은 장모의 말을 믿지 않았다.- P172
그러니까 결국 나무 베기를 차일피일 미뤄온 것도 말하자면그의 무력감 때문이었다. 아내의 핫팬츠에 손이 가닿지 않은 것처럼 그의 손아귀엔 톱을 쥘 매가리가 없었다. 그건 또 뭐랄까, 셋방살이할 적 언젠가 당했던 연탄가스 중독처럼, 의식은 또렷하여 어서 방문을 열고 공기 맑은 밖으로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고 애를 바득바득 쓰면서도 몸이 달싹하지 않는 무력감과 같은 것이었다.- P173
하기는 신학 저술 번역 외에도 다른 번역 일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건 마르쿠제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청탁받아서 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중에 출판해볼 포부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석규 나름대로 생각해낸 독서 방법일 따름이었다. 처음 신문사를 그만둘 때 생각이 실직 기간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동안 독서나 열심히 해두자는 것이었다. 바쁜 기자생활이라 독서할 짬을 통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던지! 술 마시며 허송할 시간은 있어도 막상 독서할 시간은 없는 게 기자생활이었다.-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