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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남산 투어‘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출발지는 명동역이다.
반민특위 터-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남산 예장공원-김익상 의거지 조선총독부 터 - 노기 신사터-경성신사 터 - 남산 중앙정보부 - 국치 현장- 와룡묘- 조선신궁터 - 안중근 장군 동상 - 안중근 기념관 - 백범 동상 - 성재동상 - 조선신궁 계단 - 서울역 강우규 의거지- P278
최근에는 ‘명동-종로 의열독립투쟁 투어‘를 주제로 새로운 코스도 만들었다. 명동 코스는 기존 코스와 같고, 이재명 의사 의거지 방문 후 남산대신 방향을 바꿔 종로로 향하는데, 코스는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터 - 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종로로 이동) - 김상옥 의거지 -3.1독립선언서 인쇄소 터 수송공원-신흥대학 창립지 - 태화관 - 신채호 부인 박자혜 지사 운영산파소 터 -3.1혁명 발상지 탑골공원 - 종묘공원 이상재 지사 동상 - 김상옥로 - 김상옥 최후의 격전지 - 마로니에 공원 김상옥 의사상- P278
양 손에 안중근 장군과 윤봉길 의사 배지를 각각 쥔 채 가만히 서서 참배 행렬을 바라보자니, 야스쿠니 신사에 잠들고 싶다고 말했던 국가공인친일파 신태영이 떠올랐다. 그는 바라던 이곳 대신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인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P279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하얼빈역 승차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 장군의 간절함과 운이 닿아 의거는 성공했다.- P289
그날 오전 9시께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에서 대기하던 안장군은 의장대 사이로 나와 품속에 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열 발자국 거리 앞에 있는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이토의 팔을뚫어 가슴에 도달했고 안 장군은 두 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토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 장군은 혹여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중 하얼빈 총영사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혔다.
의거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안 장군은 러시아 군인에 의해 붙잡히는 가운데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다.- P-1
안중근 장군이 밝힌 이토를 죽인 이유는 15가지다. 1. 대한제국민 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불태운 죄 12. 대한인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P290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나를 사형 피고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P290
지사들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은 하나다. 과연 나는 지사님들처럼 싸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생각의 정점에 자리한 인물이 바로 후세 다쓰지다. 그는 서슬 퍼런 일제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독립투사를 변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만약 나라면 시도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는 해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P295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P298
반가운 소식은 도쿄 릿쿄대학에서도 교토 도시샤대학처럼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3월 1일 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올 가을 릿쿄대학은 교정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기념비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 윤동주의 순국 80주년을 언급하며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도시샤대와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일 양국 간 우호의 상징으로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동주 작품을 통해 윤동주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학생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P303
릿쿄대학은 15년째 꾸준히 한국인 유학생에게 ‘윤동주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또 그의 기일에 맞춰 추도예배를 진행하는데, 그 노력이 기념비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본다. 물론 내 개인으로서는 시인 윤동주가 걸었을 그 교정을 다시 한번 방문해야할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여럿이 함께 그곳을 찾아 시인동주를 생각하며 술 한잔 올리고 싶다.- P304
신간회는 3.1혁명 후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1920년대에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독립투쟁의 선봉에 선 여러세력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결과다.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가 열렸다. 월남 이상재가 회장, 벽초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강령으로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채택했다.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큰 축인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해 만든 일제 강점기 최대규모의 항일운동 단체였다.- P305
다만 김시현 지사는 해방 후 남긴 기록에서 황옥 경부를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스스로 밀정이라고 털어놓아 세상의비난을 자초한 것은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사건을 주도하고 이끈 두 사람, 김시현 지사와 황옥 경부는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 김시현 지사는 한국전쟁 중 발생한 ‘이승만 저격 미수사건‘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경찰이었지만 목숨걸고 의열단을 지원했던 황옥 경부는 밀정인지 독립투사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김시현과 황옥 경부에 대한 평가는 후인들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지점이다.- P315
"의열단 국내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시현(82)옹이 심한 생활고에 빠져 있다. (중략)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 두 개를 전세 들어 팔 식구가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김옹은 1923년 폭탄을 갖고 상하이에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관헌에 잡혀 1년간 투옥된 것을 비롯, 전삼회 17년간, 그리고 8.15 이후엔 52년 6월 이승만 박사 저격사건에 관련되어 9년, 합쳐 약 30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무상배급밀가루(한 달에 52킬로)로 연명하는 (중략)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P318
김시현은 아내 권애리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김시현 지사는 앞서 말한 이유로합장되지 못했다. 그의 묘는 경북 예천군 호명읍 직산리 야산에 위치해 있다. 2021년 그의 묘를 발견한 후 매년 찾아 술 한잔 올리고 있다.- P319
당시에 관헌, 이재민, 주변 주민에 의한 살상 행위가 다수 발생했다. 무기를 가진 다수의 사람이 비무장 소수자에게 폭행을 가한 끝에 살해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들이었다. 살상의 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았던것은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인과 내지인 또한 적지 않게 피해를입었다. 가해자의 유형은 관헌에 의한 경우부터, 관헌이 보호하고 있던 피해자를 민간인이 관헌의 제지를 무시하고 살해한 경우까지 다양했다.
살상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지진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의 1%에서 수%에 해당하며, 인적 손실의 원인으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P322
이 비는 다른 위령비와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비석 뒷면에 학살의 주체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경찰· 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도쿄의서민 거주지에서도 식민지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슴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 P328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는 대림사는 절이 있다. 안중근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다. 절 마당에는 안중근 장군이 일본 헌병 출신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에게 마지막으로 써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이 새겨진 유묵비도 세워져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P338
도쿄에서 4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에 왜 안중근 장군의 유비와위패가 존재하는 것일까? 1909년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 치바 도시치는 안 장군의 전담 교도관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심장이라 불리던 이토를 죽인 안 장군에게 분노와 적대감을드러냈으나,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와 인품에 감화되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P338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장군의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 교도관 치바가 아무리 안 장군에게 감화받았을지라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슬퍼하는 그에게 안 장군은 ‘위국헌신군인본분‘ 여덟 글자를 남긴다. 눈물로안 장군을 보낸 그는 제대를 자청했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P338
스님은(사이토 다이켄) 두사람을 기리는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워 둘의 영정을 모셨다. 하지만 이 때문에스님은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년 대림사는 빠짐없이 안 장군의 추모제를 열고 있다. 교도관 치바의 후손이 안중근 장군탄생 100주년을 맞아 1979년 유묵을 우리 정부에 기증했고, 안 장군을 기리는 숭모회는 1981년 대림사에 안 장군의 유묵비를 세웠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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