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대장정 서재

코무덤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석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리이가 눈에 들어온다. 히데요시가 죽은 이듬해에 건립된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인데, 신사 이름 도요쿠니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도요와, 나라를 의미하는 쿠니를 합친 것이다. 코무덤 앞에 서서 도리이를 바라보니이상하게도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가 떠오른다.

이슬로 와서 / 이슬로 사라지니 / 
나의 몸이여 /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는 /
꿈속의 꿈이로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치 관조하듯 떠나는 이의 모습이 담겼다. 아름답고목가적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 시처럼 아름다웠다 할 수 있을까?- P160
"전쟁의 시대가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 역사 속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증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P166
"단 하나의 조선백자항아리에 이끌려 고미술상 가게 앞에 멈춰 선것이 사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 돌아갈 길이 없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념품 하나쯤 하자는 마음으로가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P176
그는 미술관이 개관한지 4개월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통일 조국이 생기기 전까지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단 한 점의 문화재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 나중에 통일되면 통일조국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 그는 "문화 앞에 나라라는 건 의미가 없다. 정치를 떠나 민간인의 문화 교류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깨달을 수있다"라고 늘 말하곤 했다.28- P179
물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도쿄)에 두었기 때문에 니조성은 치소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성들에 비해 해자의 폭이 좁고 천수각도 높지 않다. 참고로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을 걷다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나는데, 자객의 습격을 우려한 조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쇠와 복도를 지탱하는 못이 닿으면서 휘파람새가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휘파람새 복도‘라고 불린다. 윤동주의 도시샤대학을 거쳐 교토 어소, 니조성을 함께 걸어 보자.- P184
2005년 윤동주를 애정하는 교토 시민들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만들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시비를 제작해 우지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교토부가 우지시와 시인 윤동주 사이의 연고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장소를 내주지 않았다. 위원회는 우지시와시인의 인연을 찾는 작업을 펼쳤고, 윤동주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장소가 우지 강변의 아마가세! 다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마침내 위원회 설립 후12년 만인 2017년 10월 우지 강변에 윤동주의 시가 새겨진 ‘기억과 화해의 비세워졌다. 시비에는 윤동주가 1938년에 쓴 <새로가운길>이 새겨져 있다.- P188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P188
기념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사진이 사람들을맞이한다. 팻말에는 손글씨로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라고 적혀 있다. 긴 시간을 버텨 온 우토로 주민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기념관 개관 시간은 금·토·일 ·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화·수·목요일과 12월 28일~1월 4일, 8월 14~16일에는 휴관한다. 입장료는 일반 500엔, 고등학생 이하 100엔, 초등학생 이하 무료다. 시간을잘 알아보고 한 번쯤 가보면 좋겠다.- P194
"진폐증을 앓다 47킬로그램 몸무게로 돌아가신 이정호 선생이나 당시 탄광에 끌려간 광부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는 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바닷물과 메탄가스를 뒤집어쓴 채 섭씨 40도가 넘는 지하 1000미터 탄광 속에서 석탄과 광물을 캐다 진폐증을 앓고 떠났다. 젊은 나이에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분들은 다들 갈비뼈와 광대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됐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처음 만들 때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다."- P197
위도 36° 31′ 30.11" N, 
경도 136° 40′ 17.9" E. 
1932년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천하영웅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한 지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들러 술 한잔 올리면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금단의 땅이기도 하다. 윤 의사가 순국했을 당시에는 일본군 제9사단이, 2025년 현재는 일본 육군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기36°31‘30.1"N 136 4017 9‘E오쿠오大樂나가도때문이다. 자위대가 해당 지역을 사격장으로활용하고 있어 허가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한국인, 일본인 가릴것 없이 접근이 제한된다. - P200
현장에 있던 간수가 무릎 꿇려진윤 의사에게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하등 말할 바 없다"라고 했다. 오전 7시 27분 미간에 총을 맞고 13분 뒤인7시 40분에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 총탄이 이마를 정확히 관통해 피가 별로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P203
윤 의사는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서 윤 의사는 "태극의 깃발 높이 드날리고,
31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강조했다. 이틀 뒤인 1932년 4월 29일 오전윤 의사는 상하이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에서 백범과 식사를 한다.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아침 7시가 되자 윤봉길은 백범에게 시계를 교환하자며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윤 의사는 훙커우 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32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1만여 명의 일본 군경을 뚫고 무대앞쪽으로 나아가 중앙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 P207
윤 의사는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무대를 향해 4~5미터 정도 뛰어 들어간 뒤 소지하고 있던 두 개의 폭탄 중 하나인 물통형 폭탄을 던졌다.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고 이 순간 윤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바로 이어 도시락형 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일본 군경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윤 의사는 얼굴을 제대로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발길질을 당한 뒤 상하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P208
일제는 무자비한 취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윤 의사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선인의 각성과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강조한다. 일제군사법원은 1932년 5월 25일 윤 의사에게 살인과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위반 등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P208
윤 의사 암장지에는 월진회 일본지부가 1992년 세운 암장지적비가 있다. 이 비에는 윤 의사가 집을 나설 때 남긴 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不‘이 새겨져 있다. ‘사나이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위에는 손바닥만 한 윤 의사 흉상도 있다. 암장지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재일민단이 주도해 세운 순국기념비도 있다. 둘 다 자위대 부대 안에 있는 순국지에 들어갈 수 없는 탓에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매년 의거일인 4월 29일에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의 추모식이 열린다. 함께 들러 윤의사께 술 한잔 더 올리자.- P211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가나자와성 내부에 자리한 위수구금소다. 현재는 공중화장실이됐다. 처음에는 윤 의사가 생전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가 화장실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옛 지도를 봐도, 관련글을 봐도 변하지 않았다. 천하영웅 윤 의사가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는 정말 이곳이었다.- P213
문효세자가 모셔졌던 자리에 삼의사의 묘역이 조성됐고, 의빈 성씨 덕임이 잠들었던 자리에 임정요인들의 묘역이 만들어졌다. 백범은 일제가강제로 흩트려 놓은 왕가의 무덤을 독립투사들을 위한 자리로 바꿨다. 독립유공자를 위한 국립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라도 지사들을모실 수밖에 없었고, 백범은 주인이 사라진 효창원 묘역을 그 장소로 선정한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백범은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P224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기존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이 세워졌다.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에서 민족공원화와 독립공원화를 추진하기 위해 효창운동장 철거 및 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축구계의주민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추가지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도 벌어졌으나 창원 일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문재인 정부는 ‘근린공원시설이었던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바꾸고 효창원 묘역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예우하도록 결정했다.- P225
양근환 지사가 1921년 3월 25일(음력 2월 16일) 친일파민원식을 처단한 장소는 도쿄역호텔 2층 14호실이다. 그래서 도쿄에서 답사를 잇는 동안 그곳에 머물려고 했다. 물론 가격을 알아보기 전의 생각이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도쿄스테이션호텔, 4박, 숙박인원 1인, 조식 포함, 스탠다드룸으로 검색했다. 총 68만 3976원이 나왔다. 오호, 가격을 보는 순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쿄 한복판임에도 하루에 17만 1000원 정도면 양호하다. 물론 10초 뒤 바로 깨달았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예약하기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 가격이 이렇게 나왔다. 세금 포함 355만9784원.- P232
붙잡힌 이후의 법정 싸움에 주목해야 한다. 김 의사의 변호인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는 후세 다쓰지였다(그에대해서는 조선인의 변호인 후세 다쓰지> 편에서 더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 재판장은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 후세 다쓰지 등 변호인들은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했다.
그러나 김지섭은 이마저도 "나는 조선 사람이므로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누가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 검사의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말한다.- P242
경시청 앞 신호등에 서서, 끊임없이 오가는 차들을 보며 90여 년 전이공간에 서 있었을 청년 이봉창을 생각했다. 특히 의거 전 그가 백범을 만나 말한 "영원한 쾌락이 떠올랐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39- P247
"나는 적성한인애국단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으로써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國團의로 맹세하나이다."
20여일 뒤 의사 이봉창은 영원한 쾌락을 위해 폭탄을 던지고,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였다. 영원한 쾌락을 말했던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P249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